라인
왼쪽
오른쪽
  • UPDATE : 2019.11.18 월 15:16
> 기획/연재 > 연재
순자의 성악론
장종원 선생  |  ileaders@leaders.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신고하기
승인 2018.12.27  14:34:07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미투데이 트위터
   
 
맹자의 성선론과 순자의 성악론 가운데 어느 주장이 더 타당 하느냐 하는 문제는 항상 화제의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유가에서는 성선론이 물론 힘을 얻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성선론과 성악론 모두 한편에 치우친 견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 논리에 있어서는 순자가 더 옳다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사람에게는 천사적인 면과 동물적인 면이 다 있으므로 그 어느 한 편만 봐서도 안 된다는 파스칼의 말이 가장 합리적인 견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상이나 논리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극히 간단하지만 외연은 거의 무한대로 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자들이 그 핵심을 그르친 것 같다. 용어의 개념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 두 사람이 각자 무엇을 성(性)이라고 했느냐가 문제다. 두 사람이 다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는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위’란 틀림없이 진실이 아닌 허위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는 용어다. 그러나 순자는 ‘인위’란 뜻으로 사용했다. 맹자가 ‘성’이라고 한 것은 ‘이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성’이라고 한 것은 ‘본능’을 말한 것이다. 공자의 뜻을 따르는 자사의 “천명지성(天命謂性) 제성지위도(帝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爲敎)”라는 말에서 성은 타고난 천성이며 이성을 말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말한 명명덕(明明德)의 명덕은 이성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맹자가 말한 성도 이성을 말한 것이다. 송유들이 생물적인 본능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성선을 내세우는 것은 본능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지(良知)??양능(良能)이란 말도 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타고난 이성에 의해서 성악을 구별할 수 있고, 사람의 본능적 욕구에서 오는 물욕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의 물욕을 전혀 무시할 수 없지만 이성에 의해서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물욕을 조장하는 데나 방임하는 데 있지 않고 이성으로 통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타고난 이성을 밝힌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맹자가 성선론을 주창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면 이성은 어디에서 찾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사람마다 다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욕에 일시적으로 빠질 수는 있어도 이성을 회복하면 선악이 자명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순자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운다. 아름다움을 보면 욕심을 낸다. 나면서 노래와 이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음란해진다. 이것들은 악일뿐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하며 사람의 본성이 악인 것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가 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가 사람의 본능이란 원래 악한 것이고 선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위적인 일체의 윤리 도덕을 인간 자연의 본능을 구속하는 가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교육에 의해 교정하고 바로잡아서 악을 선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인성의 실체를 규명하기 전에 이미 선악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었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요구하는 심정이 확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론이 아무런 객관적 논리로 설명되더라도 선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의 성악론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순자는 이미 선악에 대한 주관적 기준이 확고하게 서 있었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악으로 판단했다. 악으로 판단된 본능을 주관적인 기준에 맞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도 먹줄을 받으면 곧아진다. 성선론자들이 물욕에 어두워진 사심을 어떻게 바로잡느냐는 질문에는 이성에 의해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사람은 누구나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순자의 성악론은 그 성악의 실태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 결과가 얼마나 불행한가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을 고쳐 나가야 할 것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인성이 그렇게 악하다면 선에 의한 개혁의 의식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대신 선왕의 제도인 예가 그 기준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성악론이 순자의 철학적 기초가 되어서 모든 사상이 전개된 것이 아니라 예론이 그의 사상의 기반이며 성악은 여기서 파생된 주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예론 일부는 고전예식의 움직일 수 없는 존엄성에 두고 형식과 절차 하나하나를 합리화시키는 완고한 정도의 보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론의 상례, 악론의 일부에서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목수가 나무를 깎아서 그릇을 만드는 것이나 도공이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은 나무나 흙의 타고난 대로의 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해진 제도나 가르침에는 비판이나 간여가 용인 안 되며 응분의 복종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문??사상에 대한 통제는 그의 독선적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순자의 학문이 객관적 관찰과 과학적 비판을 기초로 한다는 특색이 있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어느 부분을 제거해 놓고 보면 근본적으로 주관을 토대로 한 객관적 논리인 까닭에 사실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가 인류의 집단생활이란 데서 필요한 것이 사회 규범이라고 일컬어지는 예를 말할 때 사회발전의 양상을 말해주는 역사의 흐름에서 파악하지 아니하고 선왕의 기성제도를 절대시하고 예라는 규범을 강조하였다. 인위적으로 선으로 변화시킨다면 이 인위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선왕은 어디서 그것을 깨닫고 예를 제정했느냐 하는 물음에는 명확한 해석을 못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이성을 전혀 무시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인식론에 있어서 감각적 경험과 이성적 분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론의 혼선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주석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맹자의 성선론의 일부가 잘못 섞여있지 않았겠느냐는 견해를 갖게 했다. 물론 거기에는 문장의 착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중을 성악론에 두고서 예론이나 권학을 해석하지 않고 핵심을 예론에 두고 그 파생 이론으로서 성악론을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인 것 같다.
 
장종원 선생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신고하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미투데이 트위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중앙대로 594 |  대표전화 : 051-996-2400  |  팩스 : 051-996-2408  |  등록번호 : 부산 가 00020  |  발행·편집인 : 백재현
등록번호 : 아00219 |  등록일자 : 2015년 2월 06일 |  청소년 보호책임자 : 백재현
Copyright © 2014 일간리더스경제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