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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작만 500여 편...‘신성일’ 한국영화사 영원한 스타 타계
원동화 기자  |  dhwon@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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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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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치에 눈을 돌리기도...연거푸 낙선후 2000년 국회의원 당선
2011년 자서전에서 ‘외도’ 공개하며 큰 논란 

 
   
▲ 배우 신성일이 올해 10월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4일 오전 2시 30분 향년 81세로 한국영화의 영원한 스타인 배우 신성일이 지병인 폐암으로 타계했다. 그는 “난 ‘딴따라’가 아닙니다. 종합예술의 한 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기억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성일은 빼어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이면서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미지는 1950~60년대 기존 배우들과 차별화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반열에 올랐다.
 
1937년 서울에서 출생 후 생후 3일 만에 대구로 이주한 신성일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작정 상경해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3000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당시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 전속 연기자 됐다.
 
1960년 신 감독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신필름을 나와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은 김기덕 감독 1964년 작 '맨발의 청춘'이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반항적인 이미지로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청춘영화 대명사가 된 이 작품은 당시 서울에서만 약 36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청춘 영화가 쏟아졌다.
 
신성일은 인기 최절정기인 1964년 11월 워커힐호텔에서 엄앵란과 결혼했다. 하객과 팬 4천 명의 인파가 몰린 두 사람의 '세기의 결혼식'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신성일은 결혼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남자 배우로서는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성일의 상대역 여배우 수만 해도 100여 명이 넘었다. 1950∼60년대 신성일 인기는 미국의 제임스 딘, 프랑스의 알랭 들롱과 비견될 정도였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신성일 회고전'을 맞아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 해에만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상영됐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194편 중 324편에 등장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책에서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 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다.
고 신성일이 주연을 맡은 영화만 해도 총 500편이 넘는다.
 
신성일은 영화계를 잠시 떠나 정치에도 눈을 돌렸다. 11대, 15대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한 끝에 2000년 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2003년에는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와 관련해 광고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옥고를 치르는 과정도 있었다.
 
신성일은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신성일은 지난 2011년에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연극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고 김영애씨를 1970년대에 만나 사랑한 이야기를 공개,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여성계를 중심으로 소위 타도 신성일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스캔들과 상관없이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컸다. 그는 연기를 넘어 1971년엔 '연애교실'로 감독에 입문했고, 1989년에는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70대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며 건강에 신경 쓴 그는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는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떨쳐내겠다. 이겨낼 자신을 있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올해 10월 열린 부산영화제에도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으며 손 하트를 날려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취재진과 만나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딴따라 소리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북 영천에 한옥을 지어 살던 고인은 그곳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소규모 음악회를 여는 등 사람들의 쉼터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고인은 마지막 바람들을 끝내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원동화 기자 dhwon@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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