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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배우는 행복
장종원 선생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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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27  13: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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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학자
부처님이 나열성 죽원에 계실 때 기성약 왕은 부처님과 다른 비구들을 청하면서 반특 한 사람만 빼놓았다. 부처님은 모든 비구들을 데리고 거기 가서 앉으셨다. 기성은 일어나 청정수를 돌렸다. 부처님은 반특을 빼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지 않으셨다. 기성은 사람을 보내어 반특을 불렀다. 반특은 이내 왔다. 기성은 그 신통력을 보고 성현을 업신여긴 것을 스스로 뉘우쳤다. 그래서 반특을 특별히 공경하고 다른 비구들에게는 예사로 대접했다.

그 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옛날 마장이 있었는데 말 천 마리를 들고 다른 나라로 가서 팔려고 했다. 도중에 한 말이 새끼를 낳았다. 마장은 그 새끼는 남에게 주고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국왕을 뵈었다.” 왕은 말했다. “이것은 다 보통말로서 살만한 것이 못된다. 이 중에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슬피 우는 소리를 들으니 반드시 준구를 낳았을 것이다. 만일 그 망아지를 살 수 있다면 이 말을 모두 사겠다.” 마장은 곧 달려가 말 한 마리를 주고 그 망아지를 사고자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 오백 마리를 주고 겨우 그 망아지를 얻었다. 부처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마장은 처음에 그 망아지를 업신여겨 남에게 주었다가 나중에는 오백 마리 말을 주고 이 망아지를 돌려받았다. 아까는 반특을 박대하다가 지금은 도리어 그만을 존경하여 다른 오백 비구를 업신여기니 너 또한 저 마장과 같구나!” 라고 하셨다.

조그만 즐거움을 버림으로써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면 어진 이는 큰 즐거움을 바라보고 조그만 즐거움은 기꺼이 버린다. 보다 큰 쾌락 때문에 보다 작은 쾌락이 말살된다는 것은 필연의 사실일 것이다. 보다 큰 쾌락은 보다 큰 세력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리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불러일으킨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쾌락을 보다 크게 한 것이다. 남에게 수고와 괴로움을 끼쳐 거기서 내공을 얻으려 하면 그 재앙은 내게로 돌아와 원망과 미움은 끝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어떤 알 수 없는 하나의 힘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비록 세상이 괴롭고, 어둡고, 귀찮고,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하더라도 내게 생명이 있는 한 그 힘은 내면에서 끝없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선으로 향하려는 양심과 우주의 선의 도와 중생의 많은 도를 위하여 전진하려는 용기 있는 자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자비는 결국 미타본원의 원천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마땅히 할 일을 함부로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즐겁게 해서 마음에 따라 거리낌 없이 놀 때 나쁜 버릇은 날로 자라나게 된다. 악이 악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행하는 것이고 선이 선임을 모름이 아니라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행할 일을 힘써 행하고 마땅히 버릴 일은 힘써 버려서 스스로 깨달아 몸을 닦으면 바른 지혜는 날로 자라나게 된다. 악이 악임을 알거든 행하지 말고 선이 선임을 알면 행해야 한다. 거만과 사랑의 인연을 끊고 그릇된 견해, 잘못된 믿음, 기뻐함, 탐욕을 줄여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더러움이 없어진다. 향락이란 자기 스스로 악의 그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손발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비로소 사람들은 그 고통에 놀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자유를 요구한다. 생명의 요구에 부합하고 그 목적의 성취에 도움이 되는 생활이 가치 있는 삶이다. 가치 있는 생활이란 결국 유쾌하고 편안하고 재미있는 생활일 것이다. 이 모든 요소는 자유를 함께 하거나 적어도 자유의 지향에 부합할 때만 일어나는 기분인 것이다. 모름지기 먼저 자타의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먼저 자아의 비움에 있는 것이다. 진리의 파지자, 즉 생명의 완성자에게는 삶이나 죽음이 다 같은 생의 실현인 것이다. 그 죽음은 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고 항상 불·신을 함께 하여야 한다. 불·신을 떠나 다른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오직 불을 따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구하라,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말이다. 욕망은 출발의 근원이 인위적이 아니고 우리에게 이미 비치되어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한 생래적 충동이다. 그리고 감응의 실재에만 생명의 신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평화란 싸움이 없는 평화만이 아니라 싸움 속의 평화를 말한다. 싸움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생각으로 하는 싸움이 나쁜 것이다. 용서란 따짐이 없는 용서만이 아니라 따짐 속의 용서를 일컫는다. 따짐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적의를 품은 따짐이 나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비록 추하고 악하며 더럽고 못났다 하더라도 부처나 예수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항상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고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이 하나의 유능이고 보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비록 겉으로 질책과 싸움은 없으나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복수하는 싸움이 되는 것이고, 비록 겉으로 매를 가하더라도 마음에 자비가 있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용서가 되고 평화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서 미화되고 정화되고 성화되는 무아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세우는 곳에는 우주도 굴속처럼 좁고 괴로우며 현실도 하늘처럼 넓고 시원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비움이란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의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집착을 버리는 곳에서는 말은 바르고 행동은 자유롭고 마음은 고요하고 행복하며 무위의 열락에 잠기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각각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히말라야 산정에 혼자 서 있는 돌바위와 같은 고독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고독은 은둔의 고독이 아니라 원수들과 함께 하는 군중 속에 들어가 투쟁하면서 견디어가는 고독인 것이다. 이 고독은 잔인하나 광영이고, 최초의 시련자에게 주어지는 시련이지만 불·신의 축복이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깊은 산 숲 속에 남몰래 피어 있는 꽃 한 떨기, 대지에 마음껏 뿌리를 박은 나무 한 그루, 봄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햇볕을 마음껏 받는 나뭇잎, 시원한 산들바람을 마음껏 마시는 꽃 한 송이, 밤이면 작은 별, 큰 별을 마음껏 따먹고 솔바람·밝은 달빛을 마음껏 즐기며 맑은 이슬에 젖는 풀 한 포기, 그리고 고독의 광영과 힘과 미를 배우는 잡초 한 떨기를 보고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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