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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문턱에서] '비움'의 지혜를 갖고 싶다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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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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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환 수필가
 
요즘 우리 날씨가 단단히 미쳤다. 불볕더위란 표현조차 가소롭다. 대구를 ‘대프리카’라 한다더니 이제 코리아 전역이 ‘코프리카’다. 요즘만 따지면 아프리카보다 더 독한 더위라 해도 호들갑이 아니다. 온열 환자가 많은 것은 물론 더위로 사망한 사람들도 다수다.

십 여 년 전 교직원 팔순 부친이 밭에서 일사병으로 돌아가셨다. 교감으로 장례에 조문하면서 합천 땡볕이 무섭다고 했는데, 요즘 이 정도면 ‘기상관측사상 최고’ 운운을 넘어서 바로 재해수준이다. 열상으로 벌겋게 타들어간 사과와 물러 으깨진 수박 밭에서 넋 잃은 농민. 땡볕을 온통 몸으로 받으며 휘청거리는 발판을 딛고 작업하는 일용직 노동자. 다닥다닥 쪽방 촌 프라이팬 양철지붕을 이고 부채질도 힘겨운 노인…. TV 카메라가 보여주는 세상은 답답하여 더욱 무덥다.

30년 째 살던 남천동, 그리고 7년 째 살아온 광안리 해변을 낀 비치아파트를 떠나 해운대 신시가지 어머니 곁으로 왔다. 아버지 가신지 벌써 8년, 어머니는 금년 94세로 아직 총기는 남았지만 거동은 불편하시다.

합가는 당신이 반대하시니 같은 아파트 바로 옆 동으로 왔다. 매일 복지도우미가 방문하는 터라, 내 할 일이 한결 수월하다. 귀가 아프도록 볼륨을 높인 TV 앞에서 가만히 함께 있어주는 것이 전부다.

그동안 장남으로 마음이 무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특별난 효자는 못 된다. 전적으로 어머니를 위해서 이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난 후, 아내와 단 둘이 살면서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집이 과분했다. 잡다한 짐들도 너무 많았다.

특히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놓고, 부모 집의 가재도구며 옷가지 등을 처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충격을 받았다. 손때 절인 노모의 물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모가 돌아가셨다면 더 말해 무엇 하랴. 기념될 유품이나 사진도 있으련만 무조건 다 버리라는 거다. 제주도에 귀촌한 내 친구는 그런 뒤처리를 해주고 연세로 얻은 촌가를 리모델링해서 지금 민박을 여러 채 하고 있다.

어차피 버려질 물건이라면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게 낫겠다.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여분의 소파, 침대, 식탁과 그릇을 비롯한 부엌살림을 원하는 친지에게 주거나 버렸다. 책도 학교와 교회 도서관에 대부분 기증했다. 사진도 한 박스 가득 버렸다. 기념패도 몽땅 버렸다.

나에게도 귀소본능이 있는가. 이사한 지 두 달째 아직도 핸들을 남천동 쪽으로 틀려다 아차 하곤 한다. 해변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매일 거닐던 아파트 산책로 소나무 숲이 그립다. 벚꽃축제로 들끓던 늙은 벚나무 가로수 길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요즘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에어컨이다. 거실을 비롯하여 방마다 천정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떼 올 수도 없고 지금 이사한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7년 동안 몇 번 틀어보지 못한 에어컨이다. 바다 바람에 집이 너무 시원하고 그렇게 더운 날도 없었다. 그러나 이사 온 후 이렇게 폭염이 계속되니 남천동 에어컨 생각이 간절하다.

별 수 있는가. 선풍기 두 대로 감당이 안 되니 웃통을 벗고 지낼 수밖에. 배까지 올챙인데 내가 봐도 가관이다. 여학교 선생까지 지낸 사람의 체통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체통이라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 말이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데 러닝셔츠 벗어 던지기에 망설임이 없다.

넌지시 물어보니 홀랑 벗고 지내는 친구도 한둘이 아니니, 팬티라도 걸친 나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하기야 칠순 영감들에게 마누라밖에는 무슨 겁날 것이 있으랴. 철따라 비싼 양복 맞춰 옷차림에 신경 써준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땀띠가 났나? 며칠 째 엉덩이가 따끔하고 가렵다. 피부과에 가니 곰팡이 균이 자리 잡았다며 연고를 준다. 곰팡이라? 덥다덥다 했더니 너무한다. 곰팡이에게는 햇빛이 임자 아닌가. 마침 이 집이 서향이라 오후에 햇빛 하나는 끝내준다.

외부에서 넘어다 볼 수 없도록 거실 블라인드를 내렸다. 엉덩이를 까고 엎드리니 블라인드 틈새로 햇볕이 따갑다. 곰팡이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내 몸엔 걸친 게 없다. 죽은 듯이 엎드려 살아온 날들을 헤아려 본다. 무척이나 복닥거리며 살아온 것 같은데, 이렇게나 간단하고 가볍고 홀가분하다니.

태초에 에덴 낙원이 이랬을까. 아담의 욕망이 꿈틀댈 때, 무화과 잎으로 몸부터 가리기 시작했다지. 다시 가죽옷으로 바벨탑으로 욕심의 볼륨은 점점 커져갔고, 이 땅덩어리는 반대로 피폐해져 갔다. 지금 이 지구온난화란 재앙은 결국 인간 욕망이 자초한 결과물이 아니던가.

지금 나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마지막 팬티 한 장까지 벗어던지고 보니 세상만사 허허롭다. 버둥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 참으로 헛되고 헛되다.

엉덩이까지 까고 엎드려 나는 비로소 철이 든다.

비움으로 오히려 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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