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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문턱에서] 벌꿀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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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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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환
    수필가
친구 맥전(脈田)에게서 택배가 왔다. 밤 꿀 한 병이다. 뚜껑을 여니 비릿한 냄새가 난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다. 약간 텁텁한 뒤 끝에 달콤한 진품 벌꿀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찬다. 맥전의 고마운 마음까지 코끝에 찡하게 전해온다.
 
얼마 전 우리 고등학교 동기회 카페에 밤 꿀이 간경화나 간암에 좋다는 글이 게재되었다. 맥전은 이 글을 읽자마자 단번에 날 생각했나보다.
 
그는 세계를 누비던 공직을 퇴임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파주 땅에 터를 잡았다. 우리가 ‘맥전사(脈田寺)’라 부르는 한옥을 짓고 전원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전원생활이 꿈에서나 좋은 게지, 솔직히 노년에 초짜 농사꾼이 된 게 아니던가.
 
텃밭 규모를 넘어 이것저것 심고 가꾸고, 또 가축도 개, 닭, 거위, 염소 등, 우리 할배 농군 힘도 안 딸리나? 양봉도 여러 해 시행착오 끝에 이제 겨우 꿀맛을 좀 보나본데, 이렇게 딸딸 긁어 날 털어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에게 그리 대단한 존재는 못 된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알지도 못했다. 2013년 말부터 내가 우리 카페에 ‘묵은지’를 비롯해서 어쭙잖은 글을 올릴 때, 그는 댓글로 분에 넘치는 응원을 해 주었다. 솔직히 그의 따뜻한 격려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습작을 계속 올렸고, 이제 부산의 작은 문인회지만 수필로 등단하기에 이르렀다.
 
서로 주고받아야 오래 가는 친구가 된다는 데, 나는 이렇게 받기만 하니 이 빚을 어이할꼬.
 
‘벌꿀’ 하면 ‘몸에 좋다’는 상식과 함께 나에게는 ‘가짜’란 단어도 동시에 떠오르니 민망한 일이다. 하기야 옛날부터 ‘벌꿀은 부자지간에도 서로 속인다.’고 했으니 나만의 고약한 생각은 아닌가 한다.
 
오래 전에 조아무개 가수가 TV에 나와 우스개로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가 어릴 적에 꿀 장수가 작은 방에 세를 들었다. 꿀 장수는 설탕에 캐러멜 색소를 풀어 가마솥에 고와서 가짜 꿀을 만들었고, 교회 권사였던 그의 모친은 종종 그 일을 거들어 주었단다.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을 불러가며 주걱으로 가짜 꿀을 신나게 저으면서 ‘이 꿀이 팔려야 방세 받지’하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또 나에게는 ‘벌꿀’하면 반드시 생각나는 아린 기억도 있다. 지금은 소양 댐으로 수몰된 양구군 도사리에서 군복무를 했었다. 일병을 달고 첫 휴가를 받았다. 주임상사가 마을에서 양봉을 쳤고, 나는 집에 가져갈 선물로 꿀 한 병을 샀다. 아마 일병 봉급 반 년 치는 털었지 싶다.
 
휴가버스로 용산역까지 왔는데, 부산행 군용열차는 야간열차라 몇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꿀 병을 간수하기가 조심스러워 PX에 맡겨두었다. 나중에 찾으려 가보니 PX 바닥이 유리조각에 온통 꿀범벅이다. 고양이가 깼다는데 무슨 도리가 있나. 그때 아린 가슴이 지금도 아리다.
 
이번 3월 초에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에 귀촌한 박장로와 함께 동기동창 A가 경영하는 조경공사에 들렀다. 가는 길목의 도로변에 노란 유채꽃이 만발하다. 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봉긋하게 솟은 한라산 정상을 천천히 훑어 내려오는 그 자락 언저리, 16만평 부지에 각종 야자수를 비롯하여 조경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거대한 수목원을 방불케 한다. 뒤돌아서면 서귀포 앞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파도가 산방산에 몰려와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날린다. 누가 봐도 천혜(天惠)의 요지라 숨이 턱 막혀온다. 부러움의 수준은 벌써 넘어 완전히 압도당해 얼이 다 빠졌다. 털털한 차림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A가 그저 위대하게만 보인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든가. IMF로 온 나라가 허덕일 때, 그도 공장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 왔단다. 제발 사 달래서 헐값에 억지로 사들인 땅이 수 십, 수 백 배 뛰었으니 그의 예지에 더해진 천복(天福)은 오히려 두렵기까지 하다.
 
승용차로 경내를 두루 구경했다. 우리 키높이를 훌쩍 벗어나버린 거목들이라 나무 둥치만 보이는 발밑은 무미건조하여 좀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눈치도 빠르게 A가 설명을 덧붙인다. ‘작년에 맥전이 와서 튤립 일만 포기를 심어 놓고 갔다’고.
 
동물 가족 땜에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을 텐데, 맥전이 무슨 여유로 이 제주 땅에 까지 내려와서 재주를 부려놓았을까? 올 봄에 튤립 만개(萬個)가 만개(滿開)하면 얼마나 장관일까. 튤립을 심어 하늘의 나무와 땅의 꽃으로 버물려 조화를 이루게 하다니, 이제 맥전도 도를 통해 가는가 보다.
 
참, 꽃이 있으면 꿀벌이 모여들게 아닌가. 혹시 튤립 꽃 벌꿀은 밤 꿀 뺨치게 간 질환에 특효가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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