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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문턱에서] 아! 五六島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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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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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순복
      부산관광협회 부회장
      대륙항공여행사 대표
동래부사는 1546년 초대부사 이운암이 부임한 이래 1895년 정인학을 마지막으로 349년 동안 모두 총 255명이 임명되었다. 동래부사는 목민관의 기본 책무인 수령칠사(소송에 대한 판결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하는 등의 일곱 가지 사항) 외에도 군사시설, 군정관리, 왜관 통제, 왜사접대같은 업무를 부여 받았다. 국방과 외교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인 만큼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두뇌가 명석한 인물들이 많았다. 유교의 이념을 지배 이데올로기(Ideologie)로 삼은 조선 사회에서 목민관은 유학 진흥의 업적을 주요 평가 항목으로 삼았다. 붕당 정치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를 떠나 외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곳의 수장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던 동래부사들은 수많은 시와 문집을 남겼다.

255명의 동래부사 가운데 오륙도를 주제로 글을 남긴 부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오륙도라는 글귀라도 남긴 부사는 1867년 5월부터 1874년 1월까지 동래부사를 지냈던 정현덕이다. 본관은 동래,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이다. 1810년에 태어나 일흔 네 살까지 살았다.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 철종 1년(1850년) 과거에 급제할 때의 나이는 마흔 살, 쉰 네살되던 해 1864년(고종 1년) 사은정사(謝恩正使) 서형순(徐衡淳)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의 출세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으로 불리우며 쇠락한 왕권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대원군 이하응과 함께 했다. 심복이라 불리울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대일외교의 전권을 위임받아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明治: 명치) 신정부와의 교섭을 끝내 거부했다. 초량왜관에서 암거래를 하는 무리를 엄중 단속하였으며 외화 소지 혐의로 붙들린 박승달(朴承達)을 참형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장장 6년간 동래부사를 역임했던 정현덕은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배길에 올랐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원악도(遠惡島: 오늘 날의 고금도)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1590년(선조 23년) 동래부사로 임명된 고경명은 광주목사 임훈의 초청으로 광주 무등산을 관광하고 돌아와 여행기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정현덕은 1869년 12월 첫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가사 형식의 봉래별곡(蓬萊別曲)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그의 나이 쉰아홉 살 때였다. 범어사, 동래온천, 황령산, 영가대, 증산, 구봉봉수대 등을 돌아보고 다대포를 떠나 영도섬을 돌아본 뒤 이렇게 읊었다.
 
육지를 다 본 후에 도중(島中)으로 향하리라.
절영도(絶影島) 들어가니 수로십리 적실하다.
산하(山下)는 목장 되어 삼천 준마 용동(聳動)이라.
산상(山上)은 봉산(封山)되어 왜시(倭市) 입금(入禁) 다사(多事)하다.
점점 깊이 들어가니 수삼 어촌뿐이로다.
 
벌목(伐木) 계경(溪徑) 찾아가서 태종대 다다르니,
해상의 높은 바위 천장만장 뿐이로다.
관청대(官廳臺)가 그 앞이요 동우섬이 앞임이라.
오륙도는 동편이요 우암포는 북편이라.
창랑가(滄浪歌) 한 곡조에 선경이 적실하다.
선연(仙緣)이 업돗던지? 홍진(紅塵)에 일이 많다.
진시황 한무제도 이곳을 어이 보리?
니내몸 무삼 연분 선경을 편답하고,
불사약 있다 말이 방사(方士)의 빈말이라.
오도자(吳道子)의 복중산천(腹中山川) 긔 누라서 알아내리?
 
용동은 몸을 솟구쳐 뛰듯 움직이는 말의 모습, 봉산은 나라에서 벌채를 금지하고 입산을 통제한 산, 관청대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동우섬은 주전자섬을, 창랑가는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굴원이 지은 어부사를 일컫는 말이다. 선연은 신선과의 인연을 홍진은 번거롭고 속된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오도자는 당나라 때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산수화가다. 진시황의 방사 서불이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곳은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이었다. 정현덕은 신선이 되어 봉래산을 찾아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다. 정현덕은 깎아지른 듯 수직으로 떨어지는 태종대 절벽 위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며 진시황과 한무제도 이런 선경을 볼 수 없다 했다.

오륙도는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풍광이 다르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 아치섬(국립한국해양대학교),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 국립해양박물관, 백운포, 오륙도 스카이워크, 오륙도 SK VIEW 아파트,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오륙도 풍경은 너무도 아름답다.

해 질 무렵 동백섬 운대산에 오르면 오륙도 사이사이로 노을이 드리운다. 오색 빛의 스펙트럼은 한 폭의 그림이다.
 
신선대에서 해를 등지고 오륙도 쪽을 바라보는 일몰도 빼놓을 수 없는 풍광이다. 오륙도 일출은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일어나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배를 타고 나가 방파제 등대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오륙도 일출은 전국 사진작가들이 꿈꾸는 빛의 환타지다.
 
수도권 여행사 대표들과 언론인들을 인솔하여 오륙도 등대섬에 오르는 날, 오륙도 SK VIEW 아파트를 휘감으며 오르내리는 구름이 그려내는 한 폭의 수묵화는 천하절경이었다. 누군가 들려주던 음유시인, 레너드 코언의 아이 엠 유어맨은 내 인생에서 기절할 만큼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삶은 불가사의한 바다이고 시는 그 비밀을 해독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줍는 단서들이라 했다. 오륙도에서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시인이 된다. 대한민국 명승 24호요,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는 거룩하고 아름다웠다.
 
해가 뉘엿뉘엿 어두워질 무렵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만났다. 티끌세상을 멀리한 채 자연을 벗 삼아 술과 시와 거문고로 살아가는 현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디서 오셨냐고 여쭈어보자 대전이란다. 수많은 경승지 가운데 왜 오륙도 등대섬이냐고 묻자 죽기 전에 꼭 그리고 싶은 100곳을 정했는데 그 중에 한곳이란다. 이 겨레가 처음 태어났다는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 떠 있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 마을은 갈 수 없지만 두물머리, 연주암, 간월암, 사성암, 성산일출봉, 보령 장고도마을 등 그리고 싶은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화백과 함께 온 여인에게 오륙도 등대섬을 연인이 함께 오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진다고 하자 빙그레 웃는다.
 
미얀마 제 2의 도시 만달레이에서 11㎞ 떨어진 곳에 있는 아마라푸라에는 가장 미얀마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우빼인 다리가 있다. 해 질 녘 다리 위로 걸어가는 스님들, 소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은 가히 세계적인 풍경이다. 손에 닿을 듯 바다를 휘감은 섬들의 행렬이 펼쳐지는 오륙도 운무도 세계적인 풍경이다.
 
오륙도 등대섬에 올랐던 BBS불교TV 작가는 부산을 다섯 번 왔는데 오륙도 등대섬은 처음이라며 조용필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의 주인공이 되었다며 행복해했다.
 
추억이 시작되는 곳, 오륙도 등대섬은 평생 한번은 가보아야 할 부산의 로망이다. 오륙도 등대는 1937년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등대지기는 8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양수산부는 오륙도 등대를 관광자원화하기로 결정했다. 오륙도 등대를 동방의 등불이라 이름 짓고 오륙도 등대 밑에서 밤하늘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꿈같은 경험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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