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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그는 왜 매국의 길을 걸었을까?
백재현 기자  |  itbrian@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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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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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누가 한 말 같은가요? 바로 우리가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이완용이 독립문 건립 기념식에서 외부대신이자 독립협회 위원장 자격으로 한 연설입니다. 실제로 그는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고 독립문 건립에 거금도 쾌척합니다.
   
▲ 이완용
당시 지식인으로서 그도 세계 열강의 움직을 보았겠죠. 미국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러일전쟁 후에는 친러시아 파로 변신합니다. 일본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나라라고 보았죠. 그런 그를 고종은 미국공사를 시켰고 러일전쟁후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하며 신임 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후에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의 주모자도 이완용이었습니다. 그만큼 일본과는 적대관계 였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왜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을까요?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화조차 통역관을 쓸 정도로 일본어를 사용 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그가 일본어를 전혀 못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가 친일로 바뀐데에는 미국과 일본의 카스라테프트 조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핀과 한국을 놓고 서로 먹고 먹여주는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밀약이었죠.

고종을 내쫓고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등을 주도한 이완용은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백작의 지위를 받고,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죽을 때까지 조선 왕실과 종묘사직을 보존한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방백세 유치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라 했던가요?
만년을 갈 수치스러운 일을 그는 왜 저질렀을까요? ‘매국노‘로 욕을 하면 속이야 시원할지 모르지만 치부와 영화를 탐한 개인의 행동으로 넘기기 보다는 좀 더 깊이, 좀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싶습니다. 오늘은 1926년 이완용이 숨진 날입니다. 백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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