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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문턱에서] 천 원짜리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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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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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환 수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사랑은 관념이나 감상(感想)이 아니라 바로 '행동'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하신 목사님 말씀으로 내 가슴을 후비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 해 뜰 시간이 한참 남아서 길 앞이 어둑어둑하다. 금년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 운전대를 잡은 손이 시리다.
 
저만치 앞 건널목을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건너고 있다. 이미 파란불은 끝났다. 나는 승용차를 멈추고 노인이 차 앞에서 끙끙대는 모습을 본다. 노인이 향하는 인도 쪽에 고물상이 있다. 아직 닫혀 있는 문 앞에 이미 리어카 대여섯 대가 줄을 지어 서 있다. 이 추운 새벽 고물상 문 열기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들.
 
폐지 한 리어카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삼천 원? 오천 원? 그 한 리어카를 남들이 줍기 전에 먼저 채우기 위해 이 밤을 꼬박 지새운 것은 아닐까. 저 리어카에 가득 실린 폐지는 바로 저 분들의 아픔과 상처가 쌓인 무더기가 아닌가. 마음이 짠하게 아려온다.
 
무슨 실패의 쓴 뒤끝이 아직 남았는지, 혹시 아픈 식구는 없는지. 저 분들도 자식 뒷바라지에 자신의 노후준비 할 여념이 없었으리라. 순간 살짝 스쳐가는 '나는 괜찮다'란 안도감.
 
우리 아파트 단지 도로로 접어들며 나는 요즘 '그 양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인이라 부르기에는 젊은 그는 영락없는 노숙자 차림이었다. 낡은 모자와 옷은 꾀죄죄한 땟물로 절여 있었다. 세수한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그는 세상만사를 초월한 듯 무덤덤한 얼굴로 리어카를 끌었다.
 
그의 리어카에는 언제나 폐지가 반쯤만 실려 있고, 늙은 개 한 마리가 리어카 폐지 더미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흰색인지 회색인지 모를 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나는 짐승에게도 슬픔이 있는 줄을 알았다. 늙은 개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종종 그는 리어카에 폐지와 개를 태우고 천천히 아파트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마치 어디 피란이라도 가듯이.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개가 보이지 않았고, 빈 리어카만 끌고 가는 그의 어깨는 축 쳐져서 금방이라도 주저 앉아내릴 것만 같았다.
 
오늘은 대학병원에서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다. 석 달마다 CT 촬영을 한다. 혹시나 간에 종양이 재발 되지 않았나 예방차원이다. 아침을 굶은 채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다 다시 되돌아왔다. 예약접수증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깜빡깜빡 하는 일이 다반사다.
 
9시 예약시간이 빠듯하다 싶어 아파트상가를 급히 돌아 나오는데, 저만큼 '그 양반' 같은 사람이 길바닥에 앉아 있다. 입을 꽉 다물고 방석도 없이 영하(零下)의 맨바닥에 앉아 있다. 절단 된 양 손목이 살을 에는 바깥 공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엎어 놓은 모자 속에는 달랑 동전 두어 개만 보인다. '그 양반'은 아니다.
 
몇 걸음 지나치다가 퍼렇게 언 저 손목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다. 얼른 지갑을 꺼내 열어보니 마침 만 원짜리 사이에 천 원짜리가 한 장 있다. '힘 내시오.' 지폐를 내밀자 그는 눈을 번쩍 뜨며 반색을 한다. 두 손목으로 천 원짜리를 받아들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걸음을 내딛는 나의 뒤 꼭지에
 
"미안합니다."
 
CT 촬영대에 누워 조영제 약물이 주입되자 온 몸이 후끈거린다. 재채기를 참으려고 애를 쓰는 그 와중에도 '미안합니다.'고 한 그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왜 '고맙습니다.' 하다 말고, 다시 '미안합니다.'라고 했을까. 이렇게 비참한 꼴을 보이는 게 미안하고, 그걸 이용해 구걸하는 자신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병원검진을 마치고 세 시간쯤 후 우리 아파트상가 앞으로 되돌아 왔다. 혹시나 기대했었는데 역시 그는 없었다. 아까 지갑을 열 때, 천 원짜리가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만 원짜리 한 장을 붙잡고 나는 세상 무너지는 고민을 했으리.
 
성경은 '사랑은 행동'이라 말씀하시는데, 얄팍한 내 그릇은 천 원짜리 밖에 되지 않구나. 천 원으로 내 스스로 자위하며 만족하는 위선의 구린내.
 
"미안합니다, 내가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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