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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저우서우천(周壽臣), 19세말 부산해관에서 활약한 중국인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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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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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순복
      부산관광협회 부회장
      대륙항공여행사 대표
부산해관과 초량왜관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876년 이전에도 부산항은 있었다. 바로 초량왜관 시대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두모포왜관 시대, 절영도왜관 시대를 들 수 있다. 따라서 부산항의 온전한 역사를 말하자면 왜관 시대부터 이야기하는 게 마땅하다.

부산항이 근대적 개항을 한 이후, 1878년 두모포에 임시해관(지금의 세관)이 설치되었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세금 징수를 둘러싸고 일본은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행패를 부렸고, 조일 양국은 수차례 협의를 진행했다. 그런 연후에 드디어 1883년 7월 25일 「조일통상장정」및「해관세칙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부산해관(釜山海關)이 본격 출범했던 것이다.

부산해관으로 인해 부산항은 비로소 국제적인 해양네트워크에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관의 초대관장은 1883년 영국인 William Nelson Lovatt가 부임했으며, 재임기간은 2년 8개월이었다. 이후 2대 해관장은 2년, 3대 해관장은 무려 10년을 근무했다. 이처럼 부산해관장을 지낸 인물들은 모두 유럽인들이다. 하지만 해관원으로 근무했던 사람 중에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바로 청나라 사람 저우서우천(周壽臣)이다. 필자가 이 인물에 주목한 이유는 부산해관에 청나라 관리가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우리나라 논문 자료는 거의 없었다. 단지 부산해관과 인천해관에 근무했다는 한두 줄 기록뿐이었다. 중국 자료를 검색한 결과, 퍼즐 맞추기 식으로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실마리로 하여 전문 학자들이 후속연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풍운아 위안스카이(袁世凱)
 
위안스카이는 1912년 청나라 마지막 총리대신이었다. 그는 1913년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을 지냈고, 1916년 중화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3명의 조선 여인을 포함, 아홉 명의 첩과 17명의 아들, 15명의 딸을 거느린 가부장적 가장이었다. 난세의 간웅, 나라를 훔친 대도(大盜)라 불렸던 위안스카이는 그야말로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

그의 출세는 1882년 임오군란이 빌미를 준 청군의 조선 출병에서 시작된다. 조선의 국정 운영을 감독하는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며 식민지 총독처럼 내정에 간섭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었고 공식 행사 때는 언제나 상석에 앉았다. 고종 황제가 명성황후의 이종사촌인 김씨를 보내 아내로 삼게 하자 김씨가 몸종으로 데려간 이씨와 오씨까지 첩으로 삼아 조선 왕실을 모독했다. 고종황제가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자 정신 나간 혼군(昏君)으로 몰아 폐위시키려고 했을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다. 그가 좌지우지한 10년(1885년-1894년)동안 조선은 중국의 반(半)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위안스카이는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는데 앞장서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조약을 체결 조계지를 설정하고 치외법권을 인정받았다. 그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산둥(山東: 산동)반도에서 화상(華商)들이 밀려와 영국산 면포와 비단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청국상인의 조선 진출을 적극 도왔고 밀수까지 눈감아주도록 세관에 압력을 넣었다.
 
갑신정변의 회오리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갑신정변의 주연배우는 김옥균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위안스카이와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죽첨진일랑)의 수읽기가 있었다. 위안스카이의 상관이었던 우자오유(吳兆有: 오조유)가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창덕궁 공격을 미적거렸다. 위안스카이는 그러다가 세월 다 지나간다며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위안스카이의 공격이 개시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겁을 먹었다. 일본군은 정예병이므로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무라카미(村上: 촌상) 중대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갑신정변의 시작은 우정총국 낙성식 축하연이었다. 우정총국 주변에 불을 지른 뒤 소란스러운 틈을 이용 연회장을 곧바로 습격, 민영익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불이야 하는 소리에 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갔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행동대원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얼굴은 물론 온 몸에 자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묄렌도르프는 미국공사 푸트와 함께 쓰러져있는 민영익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공사관 주치의였던 알렌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했다.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살려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어 국립병원을 설립했던 알렌은 조선과 다른 봉합수술을 한의사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수술하는 과정을 보게 했다. 당시 상황이 알렌의 일기에 남아있다.

“묄렌도르프의 집에 당도해보니 중상자의 상태는 피범벅이 된 끔찍한 상태였다. 나의 당당한 치료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14명의 조선인 의사들이 옆에서 지켜보았다.”                

위안스카이가 민영익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묄렌도르프의 집을 찾았다. 보초를 서고 있던 통역관 탕사오이(唐紹儀: 당소의)가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위안스카이를 막았다. 호통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던 위안스카이는 씨익 웃으며 그냥 발길을 돌렸다. 탕사오이의 준수한 용모와 당당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위안스카이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관비 유학생 출신들을 연결시키는 첫 만남이었다. 27년 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총통과 국무총리가 될 두 사람은 조선 땅에서 그렇게 만났다.
 
도미유학생 출신, 저우서우천의 등장
 
위안스카이는 외교와 통상에 관한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청나라 관비 유학생 출신들을 적극 활용했다. 여기서 청나라 관비 유학생에 대해 잠시 소개하기로 한다. 1874년 청나라 정부는 서구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120명의 청소년들을 선발하여 미국 유학을 보낸다. 이때 홍콩 출신 13세 저우서우천 소년도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청나라 정부가 이런 특단의 정책을 실시한 배경에는 한발 앞선 일본 정부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정부는 1871년 12월에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했고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절단 속에는 당시 30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포함되어있었다.

청나라 소년유학단은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에 비해 규모와 기간이 훨씬 크고 길었지만 중도 하차로 막을 내렸다. 미국정부가 중국인의 미국이민을 단절하고, 유학생의 귀국 조치도 단행했기 때문이다.

저우서우천은 귀국하자마자 위안스카이에게 발탁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국제 정세의 회오리 속에서 영어통역 수요가 폭증했고, 저우서우천만큼 국제화된 인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는 유학생 출신 중에서도 탕사오이, 양루하오(楊如浩: 양여호), 저우서우천을 몹시 아꼈으며 오랜 세월 후원했다. 저우서우천은 1883년 부산해관 통역관을 시작으로 원산세관에 근무했다. 1896년까지 13년간 조선에 머물렀으며 마지막 보직은 인천주재영사였다.
 
저우서우천과 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는 독일 브란덴부르크 출신이다. 1882년 12월 26일 고종황제의 특명을 받고 조선해관 총세무사가 된다.  그는 조선의 관복을 입었다. 목인덕(穆麟德)이라는 이름을 썼으며 목참판으로 불리웠다. 영문 직함은 Inspector General(감찰장관)이었다. 그는 조선 땅에 2년 10개월 동안 머물렀다.
 
묄렌도로프가 청나라 정부에 영어가 가능한 해관원의 파견을 요청했고 이때 저우서우천이 조선 땅으로 오게 된다.
 
1883년 11월 25일 청나라의 조선 총판 상무위원 진수당(陳樹棠)과 함께 부산을 방문했다. 덕흥호 사건 진상조사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무역을 하던 중국 광동성 출신 황요동(黃曜東)은 일본인 거류지에 덕흥호 지점을 개설하고자 했다. 일본영사관(1880년 개관)이 청나라 무역상의 부산 진출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면서 동아시아 삼국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국이사부(淸國理事府)가 만들어진 뒤 1884년 영사관이 문을 열었다. 부산 속의 차이나타운 청나라 조계지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할 때까지 10년간 호황을 이루었다.
 
부산항의 선박 입항과 화물에 대한 관리를 맡았던 부산해관은 1883년 7월 3일 통상업무 사법경찰의 업무를 보았던 부산 감리서는 1883년 8월 19일 문을 열었다. 부산감리서의 초대감령은 이헌영이었다.
 
저우서우천은 초량의 찻집에서 일하던 조선 여인을 만나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태어난 후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내키지 않는 일일수록 기를 쓰고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과 필연을 따지지 마라. 두 개가 뒤엉킨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제야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과 여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라.”                  
 
홍콩 근대화의 영웅
 
저우서우천은 귀국 후부터 승승장구했던 것 같다. 그는 교육, 철도, 금융, 외교, 항만건설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천하를 손에 쥔 위안스카이가 높은 관직을 주겠다고 했지만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홍콩으로 낙향했다. 위안스카이는 고향 홍콩으로 돌아가는 저우서우천의 가슴에 훈장(가화장: 嘉禾章)을 직접 달아주었다. 중화민국 최초의 훈장이었다.
 
저우서우천은 혁명은 명분을 내세운 폭력이며 공포를 수반한다. 삶에는 규칙이 있을 수 없다. 권력과 폭력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저우서우천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속설을 죽는 날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홍콩은 중국이다. 중국인의 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살았다. 홍콩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태평신사(太平紳士)로 추대 받으며 10년에 한명씩 부인을 맞이했다. 거북이처럼 장수하고 싶다는 꿈을 이룬 저우서우천은 1959년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우서우천 평전이 지난 2006년 홍콩에서 발행되었다. 번역본이 없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표지의 홍보문구만 봐도 그가 홍콩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인으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다.
 
‘홍콩의 큰 인물, 저우서우천, 중국과 서양을 꿰뚫은 학문, 사방천지를 누빈 활약, 정치와 비즈니스 양면의 조화, 빼어난 삶의 전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저우서우천이 만났던 초량찻집의 조선 여인과 아들의 삶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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