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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우렁각시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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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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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환
     수필가
‘삼식이 새끼’

퇴직 후에 두문불출 소파에 드러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을 놓지 않는 나에게 언젠가 떨어질 아내의 벼락이다. 아직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더라도 부글부글 끓는 울화통이 조만간 폭발하고야 말리라.

일찍이 이 사실을 예감한 나는 ‘아내의 다정한 요리 도우미’가 되리라고 선수를 치고 글까지 썼었다.
 
요즘 아내가 자주 짜증을 낼 때는 언제인가? 바로 식사 준비할 때인 것 같다. 때맞춰 하루 세끼 식사준비가 늙은 부인들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란다. 옛날에는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상을 오래 전에 받았겠지만, 요즘이야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식단 걱정하지 않고, 제때 차려주는 밥 먹고 사는 수가 없나 궁리하게 된다. 실버타운 생각도 해 보지만, 돈도 많이 들뿐더러 노인끼리 모여 있으면 너무 고리타분하겠다는 염려가 든다.

그렇다. 식사준비가 가장 힘 든다면, 바로 그곳에 문제의 해답이 있겠다. TV 요리 강습 프로를 보면 요리사 곁에는 반드시 요리 도우미가 있다. 미리 다 준비된 재료에 요리사가 시키는 대로 요리 재료며 기구를 척척 챙겨주고 있다. 입에 혀처럼 잔심부름을 하면서 뒷정리까지 해주고 있다.

또 요리사가 심심찮게 계속해서 말벗도 되어 주면서 웃겨 주기까지 한다. 그래, 바로 저것이야. 하루 두 끼든 세 끼든 아내 곁에서 파 썰으라면 썰고, 깨소금 찧으라면 찧고, 마늘 까라면 까고, 도란도란 말벗까지 되어주는 사람.
 
나는 앞으로 아내의 착실한 ‘요리 도우미’가 되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따지고 보면 약은 수다. 식사준비를 직접 하지는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47, 48년생의 선교회 모임에 책임을 맡게 되었고, 교인들 앞에서 각 부서의 1년 계획을 발표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 때 나는 우리 부서의 영감님들이 요리를 배워 ‘마나님 생일상 차리기’가 금년 목표라고 해버렸다.

폭소 속에 교인들의 반향이 뜨거웠다. 나는 단번에 마나님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뿐 한 해가 덧없이 지나갔다. 요리강습회에 회원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주도 촌집에 들락거리느라 내가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큰 소리만 쳐놓고는 다음해 우리 선교회의 책임에서 벗어났고, 삼식이 노릇은 계속 되었다.
 
금년 초 아내가 척추협착증으로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내가 졸지에 식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세끼 식사뿐만 아니라 집안 청소며 빨래까지 모두 다 내 차지다. 뺀질거리다가 완벽하게 뒤집어쓴 셈이다. 한 끼 끝나면 다음 식단이 고민되고, 또 식사 시간은 왜 그리 빨리 다가 오는지. 누가 반찬이라도 좀 해주면 좋으련만, 표도 나지 않는 집안일은 끝이 없다.

고난 속에 신심은 깊어지는 것일까. 수술 후에도 차도가 없는 아내를 보며,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내가 아내를 힘들게 하는 자였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몇 년 전 하나님과 교인들 앞에서 뻥을 터뜨린 죄를 눈물로 회개했다. 우스개처럼 한 약속도 약속임을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내 허술한 회개에도 즉각 응답하신다. 재수술을 고민하던 아내가 빠르게 회복되어 이제 짧은 거리는 걷기도 하고 운전도 하게 되었다. 물론 아내의 회복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틀림없다는 확신은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일인지….
 
새벽기도를 다녀오면서 국거리가 없는데 오늘 아침에는 무엇을 먹을까 끙끙댔다.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내는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다. 이럴 때 우렁각시라도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게 웬 일인가.

냉장실에 큼직한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이 하나 있다. 추어탕이다. 분명히 어제는 없었다. 일전에 처남댁이 가져다준 추어탕은 벌써 먹은 지 오래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갑자기 우렁각시는 왜 생각이 났을까.

추어탕을 끓이니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횡재한 기분이다.

“무슨 국이오?”

아내가 어느새 와서 의아해 한다. 냉장고에 있더라고 하자 아내는 버럭 성부터 낸다. 냄새를 맡아보더니 사정없이 싱크대에 쏟아버린다. 좀 잘 챙기라는데 또 썩혔다고 타박이다. 아니라고 해도 전에 추어탕을 지금껏 두었다고 윽박지른다. 아무래도 전에 것은 다 먹은 것 같은데, 깜빡깜빡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으니 우길 수도 없다.

잔득 편치 않은 기분으로 국 없이 식탁을 차렸다. 막 한 술 뜨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언니, 무슨 잠을 초저녁부터 주무세요? 두 분 다 주무셔서 추어탕 냉장고에 넣어두고 왔어요. 아직 아침 전이지요? 산초가루 넣고 끓여 잡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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