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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파리 학회 참석… 도난사고와 교훈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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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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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향은
     고신대학교 교수
지난 여름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파리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학회에 참석해 발표도 하고 보고팠던 친지들도 만나면서 내 평생 기억될 만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었다. 이렇듯 야무졌던 나의 꿈은 파리에 도착한 첫 날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학회 장소로 이동하였다. 당일 학회 일정을 모두 마칠 즈음 캐나다, 스위스, 스페인의 친분 있는 학자들과 반가운 재회를 했다. 세 사람 모두 학회 장소와 가까운 곳에 여장을 풀고 있었다. 이들은 내가 학회로부터 먼 곳에 있는 숙소를 찾아가야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또다시 학회로 나와야 하는 상황임을 눈치 채고는 내가 묶게 될 호텔 근처로 같이 이동한 후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나와 동료들은 내가 예약한 호텔의 약도를 펼쳐 들고서 쌩 드니(St. Denis)로 향했다. 시내 중심가와 다소 떨어져 있는 파리 외곽의 변두리 동네에 호텔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호텔 안팎이 무척 훌륭했다. 호텔 바로 앞쪽으로는 프랑스의 저명한 역대 왕들이 묻혀있는 고딕 양식의 유서 깊은 대성당이 있었다. 이렇게 괜찮은 곳을 와보지도 않고 예약하게 된 것이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름다운 성당 안을 잠시 둘러 본 우리는 성당 근처에서 작은 음식점 한 군데를 발견했다. 여름 저녁 테라스에 테이블을 몇 대 차려놓은 아랍 식당에서 우리 넷은 그날 저녁 맛있는 식사와 정다운 교제를 나눴다. 서양 친구들은 분명 각자 저녁 값을 내려 할 테지만 나를 위해 이곳까지 와준 동료들의 따뜻한 배려에 나도 뭔가 작은 보답을 하고 싶었다. 기분 좋게 저녁 식사비용을 지불한 후 동료들과 식당을 나섰다.

식당에서 호텔까지는 채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우리 네 사람은 연신 웃음 띤 얘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갔다. 너무도 행복한 파리의 여름밤이었다. 그렇다, 바로 이 순간이 내가 그토록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이렇게 달콤한 보상을 기대했기에 지난 몇 달 또는 몇 년 간의 힘들었던 날들을 무던히도 견뎌오지 않았던가. ‘그래 난 자격이 있어, 열심히 일한 당신, 즐겨라!’라고 내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려던 찰나였다.

그때였다. 오른쪽 어깨에 갑자기 큰 압력이 가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내 핸드백을 움켜쥔 채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1초도 안될 만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 마치 느린 동작 화면처럼 펼쳐졌고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사투는 빼앗으려는 자의 승리로 끝났다. 사력을 다해 뒤좇아 가봤지만 나는 ‘닭 쫓다 지붕 쳐다보는 개’가 되고 말았다.

한순간에 속수무책으로 귀중품을 모조리 도난당한 어처구니없는 신세를 한탄할 겨를이 없었다. 더 끔찍한 악몽이 곧이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뒤에서 나와 악당의 실랑이를 목격하고 아연실색해 있었던 스페인 동료에게도 연달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로 인해 내 동료까지 어이없는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을 보자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 좌절감, 분노를 느끼며 몸서리쳤다.

도난당한 동료를 포함해 모든 이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에워쌌다. 스위스 동료가 자신의 휴대 전화를 빌려줘 우리는 먼저 신용카드 도난신고를 한 후 가까운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찰서에 가면 뭔가 대책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대기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면서 나의 기대감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두 도난 사건의 조서를 따로 작성해야 하며 각각 증인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와 스위스 동료가 먼저 조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조사실로 들어가자 우리가 왜 그리도 오래 동안 밖에서 기다려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담당 경찰은 실무실습 중인 듯 보이는 후임을 가르치고 있었고, 우리는 모든 질문에 같은 답변을 두 사람에게 거듭해서 말해야 했다. 그리고 실습생의 계속되는 타이핑 에러를 지켜봐야 했다.

자정 무렵 경찰서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조서를 작성하고 나온 시각이 어느새 새벽 3시였다. 대기실에 있던 스페인 동료와 캐나다 동료의 얼굴은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듯 했다. 피곤이 몰려온 얼굴의 초췌해진 두 동료를 쪽 창 하나 없는 밀폐된 조사실로 들여보내야 하는 내 마음은 너무나도 아팠다.

다음날 아침 9시에 이들의 공동연구 발표가 있고, 캐나다 동료는 발표 직후 파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미안하다고 말해도 충분한 사과가 될 리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나에게 스페인 동료는 자신은 괜찮으니 어서 호텔로 돌아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 곁의 캐나다 동료는, 다음날 한국대사관에 가서 급히 여권 재발급을 해야 하는 바람에 자기 발표를 보지 못하게 된 내게 미리 석별의 인사를 건네면서 자신은 친구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유로화를 꺼내 나와 스페인 동료에게 절반씩 나눠주면서 밝게 웃는 모습으로 조사실을 향해 저만치 멀어져 갔다.

나는 학회 직후 귀국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다음 날 아침 학회에 참석하는 일 보다 여권을 재발급 받는 일이 급선무였다. 당일 오후에 내 포스터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제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가까스로 학회로 올 수 있었다. 발표 후 만난 스페인 동료와 스위스 동료는 간밤에 잠 한 숨 못자고 호텔에서 나와 발표장으로 향하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지만 무난히 발표를 잘 마쳤으며 청중들의 반응도 좋았다고 했다. 캐다나 동료는 내게 인사말을 재차 남기고 떠났다 했다.

지금도 문득 그때 파리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생각나 애석할 때가 참 많이 있다. 파리에 도착하기 전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에 머물면서 곳곳에서의 아름다운 풍광과 추억을 담은 디지털 카메라와 사진 300여 장, 중요한 문서가 저장되어 있는 USB, 학회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연구회의 노트, 동생이 사준 예쁘고 가벼운 빨간색 가죽지갑과 그 안의 현금과 신용카드, 10년 넘게 써온 손거울과 립스틱, 그리고 몇 해 전에 남포동 지하상가에서 산 나의 애장품, 꽃 수로 장식된 예쁜 손가방까지.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소중했지만 역설적으로 이토록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기에 더 귀하고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여정 중의 준비와 차림, 처신에 대해 유익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힘든 일을 함께 겪은 동료들과 더 깊고 두터운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예기치 않은 봉변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기보다 침착하고 성숙하게 대응하는 노련한 경륜과 지혜를 한 수 배우게 된 것도 내게는 빼놓을 수 없는 큰 수확이었다. 참, 한 가지가 더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국에서 조차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경찰서를 파리에서 가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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