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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믿고 싶은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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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1  16: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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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환
   수필가
 
아내 친구 S선생과 J선생이 한 시간 내로 문병을 오겠다고 전화가 왔다.

나는 후다닥 청소기부터 돌리고 눈에 띄는 대로 집안을 정리했다. S선생은 아내와 교육대학교 동기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J선생은 아내의 여학교 두 해 후배다.

아내는 금년 초부터 극심한 다리 통증으로 보행이 힘들어졌다. 척추협착증에다 디스크까지 터져 신경을 누르기 때문이라 했다. 수술 받은 환자들은 후유증이 있다고 대부분 수술을 말렸다.

그러나 지난 6월에 결국 수술을 받고 말았다. 다리에 마비 증세까지 오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복단계의 재활치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한다. 이제 두 달 넘게 조심조심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 살림은 모두 내 차지다.

S선생은 이미 여러 번 문병을 왔는데, 또 오겠다고 한 것은 J선생 때문이다. S선생은 5년 전에 정년퇴임을 했고, J선생은 아내와 함께 17년 전에 같은 학교에서 명예퇴임을 했었다.

아내는 그때 분위기에 휩쓸려 명퇴신청서를 제출하고는 바로 후회했다. 교감에게 성가시게 하는 것이 죄송하지만 바로 신청을 철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함께 신청한 후배 J선생이 제주도 여행으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혼자만 철회하는 것은 J선생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J선생을 포함한 명퇴교사들은 한두 해 동안은 국내외 여행으로 신났다. 그러나 차츰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사람 두 사람 빠지게 되고, 이내 아내는 지겨움으로 넌더리를 쳤다. 결국 오십대 중반의 나이로 다시 전라남도 교사임용고시에 도전하여 보란 듯이 합격하고, 여수에 있는 초등학교에 부임했다.

다음해 아내의 복직에 자극받은 J선생도 전라남도 교사임용고시에 응시했다. 아내가 합격하는데 자기는 못하랴 자신만만했지만 불합격이었다.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웠던지 차츰 소원해지더니 소식을 끊은 지가 10년째 접어든다.

그런 J선생이 찾아온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10년 치 쌓인 회포를 푸는 일인데 얼른 내가 자리를 피해 주어야지. 영도 바둑친구에게 전화하고는 아파트 옥외주차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미처 차를 타기도 전에 딱 마주치고 말았다. 못 본 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두 분 다 눈이 동그래진다. 특히 J선생은 더욱 놀란다.

“어떻게 이리 젊게 보여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훑어본다. 요새 친구들이 날더러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고 하더니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예, 사실은 제가 이선생 시동생입니다.”

J선생은 그러면 그렇지,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런데 어떻게 형제분이 너무 닮았네요.”
“예, 어릴 때부터 형님하고는 쌍둥이 같다고 했지요.”

내가 승용차 리모컨으로 차문을 열자, 지켜만 보고 있던 S선생이 ‘이 차는 이선생 찬데?’하고 미심쩍게 나를 쳐다본다. 너무 장난이 심했나 싶어

“하하하, 죄송합니다. 농담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출발하며 백미러로 보니,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두 분이 쑥덕거리며 서 있다. 이선생 시동생이 어떻게 자기들을 알아볼까.

오늘따라 바둑 수가 잘 보인다. 이 친구와 나는 호선으로 용호상박인데, 내리 세 판을 이겨 버렸다. 특히 세 번째 판은 내 대마가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그런 묘수를 발견했는지, 거꾸로 친구의 대마를 잡고 살아버렸고 바둑은 만방으로 끝이 났다.

앞으로 내가 당당히 백을 쥐게 되었다. 내기바둑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이 나는지, 부산항대교를 타고 남천동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난다.

“우리 나이면 다들 맛이 갔어. 그 똑똑한 양반들이 시동생이라니 홀딱 속기는”

그러자 아내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내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은 전해 들었을 거고, 지금쯤 새까맣게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라 짐작했겠지.

“사람은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아내의 명언이 적잖게 놀랍다. 그런데도 얄팍한 내 똥고집이 심술을 부린다.

“J선생 전화번호 좀 주소. 은행 예금을 몽땅 찾아, 냉장고에 넣어두라고 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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