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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꽃이 피다[리더스 칼럼]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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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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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보경 
   시인
호야는 행복한 전언처럼 꽃을 피운다. 즐거운 편지처럼 나는 호야꽃을 읽는다. 웅숭깊고 그윽한 향기를 타고 상서로운 기운이 번져간다. 향기로운 소식처럼, 행운의 전조가 집안 구석까지 그득하다.

호야가 꽃을 피우는 일은 흔치않다. 맨 처음 꽃망울이 맺힌 걸 보았을 때 긴가민가했다. 설마 꽃이거니 하던 작은 멍울이 천천히 속을 열고 축적된 향기와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펼치는 순간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천천히 그리고 쉼 없이 한 송이에서 또 한 송이로, 피었다 지고 다시 피는 호야꽃은 끈기가 대단하다. 이 꽃송이에서 저 꽃송이로 꺼지지 않는 성화를 건네듯 어둠을 물리고 환하게 불을 밝힌다. 그래서 첫 꽃은 새로운 발견처럼 다가왔다. 눅눅하고 응어리진 지난 시간에 대한 기분 좋은 암시이며 예언이며 축전 같은 것, 마치 드러내면 사라질 것 같아 어딘가 몰래 감추어야 할 비밀 같은 꽃이었다.

과잉의 감정이입이 부담스러웠을 것인데도 호야는 어김없이 올해도 꽃을 피우는 중이다. 꽃은 핀 자리마다 왔다가 갔다는 꽃 같은 흔적을 남긴다. 나이테처럼 동그랗게 쌓인 꽃테가 제법 소복하다. 흔적조차 어떤 행운을 부르는 부적 같다.

부적에 대한 믿음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언자 모하메드는 부적이나 주문을 외는 행위를 금했지만 이슬람 문화권 외곽이나 지방에는 지금도 마법에 기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세상에도 근거 없는 믿음에 제 운명을 거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근거 없는 믿음의 논리를 입증할만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단지 그런 믿음에 운명을 거는 이들에게는 믿음 그 자체가 근거를 상관하지 않는 충분한 근거가 될 뿐이다.

가까운 친구에게 호야꽃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친구는 꽃을 피우는 꽃들에게 부질없이 인간의 희망과 기대를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대상에 감정이입과 무거운 서원을 주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집착이라는 것이다. 친구는 비슷한 경험을 얘기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때 집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며 난이 줄줄이 꽃이 피웠다고 한다. 드디어 힘든 시간이 지나고 좋은 일이 올 거라는 믿음에 가슴이 떨렸지만 더 오래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무척 고달프고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마법 같은 행운을 바라거나 적어도 힘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암시하는 어떤 기운이나 전조를 간절히 기다릴 때가 있다. 그래서 주변의 흔한 일상들이 어떤 예감처럼 달라져 보일 때 근거 없는 기대와 설렘을 갖기도 한다. 허술하고 비논리적인 믿음이어도 안도하고 위로받는 시간이 되어준다면 그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심리학자들도 근거 없는 미신도 믿는 동안 막연한 불안감을 덜어주고 자신감을 키워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잘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긍정적인 힘을 주고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반면, 의심하는 마음은 우리를 더욱 부정적으로 기울게 해서 할 수 있는 일조차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착각적 인과관계(Illusory Causality)일지라도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을 덜어주는 믿음을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다만 근거 없는 믿음이 파놓은 더 깊은 불안과 고통의 함정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호야꽃에게 더는 근거 없는 기적과 행운을 기대하지 않는다. 힘들고 팍팍한 시간을 위로해주는 꽃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순간일 뿐 더는 무거운 짐과 근심을 떠넘기지 않는다. 호야꽃은 내게 위로와 격려의 아이콘일 뿐이다.

호야꽃은 꽃이다. 꽃이니까 피고 진다. 꽃이 오는 것처럼 꽃이 지는 것도 귀하다. 흔하지 않게 피는 호야꽃이지만 질 때는 여느 꽃들처럼 황망하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꽃이파리를 바라보면 아프고 서럽고 허허롭다. 그런데 그 허허로움은 텅 빈 것이 아니다. 꽃이 핀 순간보다 더 꽉 찬 세상이 들어 있다. 제 몸을 낱낱이 해체해서 보여주는 한 세상이 있다. 모질게 붙들었던 집착이 사라진 자리 눈부신 무상이 빛나고 있다. 호야꽃이 지는 순간은 그래서 더 귀하다.

다시 호야꽃이 피고 진다. 가장 허약하고 척박한 줄기 끝자락에서 아스라한 낭떠러지처럼 피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툭 지고 있다. 잊지 말라는 무언의 소식을 전하는 호야꽃을 바라본다. 꽃멍울이 클수록 호야의 고갯짓은 깊고 무겁지만 그 꽃에 거는 운명의 무게는 무겁고 어둡지 않다. 머지않아 더 아름답게 사라질 꽃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운명은, 운명을 믿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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