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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자 은성이[리더스 칼럼]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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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9  16: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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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환
   수필가
“할아버지, 나오세요!”

내 칠순 잔치에 축하 노래를 부르겠다고 손자가 장난감 기타를 들고 나서며, 나를 불러낸다.‘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모두 따라서 함께 부른다. 93세 어머니까지 손뼉을 치며 부르신다. 한 쪽 발끝을 들고 고개까지 까딱거리며 노래를 선창하는 일곱 살 손자에게 ‘하하하’ 박수가 쏟아진다.

“은성아, 사회까지 은성이가 봐라”

장난삼아 툭 던진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은 마이크를 달래서 손에 쥐더니 스스럼없이 폼을 잡는다.

“오늘의 주인공, 사랑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엉겁결에 마이크를 잡았다.

“내 칠순을 축하해주시는 어머니, 형제자매께 감사드립니다. 귀한 좌석을 마련한 내 아들 영훈이와 우찬이, 특히 며느리 혜현이 너무 고맙고, 우리 은성이가 사회까지 보다니 너무너무 기쁩니다. 내가 발병한 이후 10년 세월 한결같은 수고를 아끼지 않은 아내의 헌신에 눈물로 감사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내까지 불러내며 기어코 제 할머니를 울먹이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할머니도 나오세요.”

대전에 사는 남동생은 연방 감탄을 쏟아놓는다.

“우리 한씨 집안에 저런 사람은 없는데!”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광안리 해변의 한정식당 홀에서, 축하공연이라며 개다리 춤에다 비보이 흉내로 무대를 누비는 손자를 바라보며 내 마음도 울컥해진다. 평생소원 하나가 이루어지는 듯해서다.

왜소한 체격에다 소심한 성격,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남 앞에 당당히 나서질 못하는 나도 내가 싫다. 항상 활달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 아무개나 끝내주는 친화력으로 순식간에 주위 사람들과 사귀어버리는 P나 O는 정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내 성격 고쳐보려고 왜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천성이 그러니 억지로 하는 행동은 역시 거북했다. 교감으로 남 앞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던지.

나는 비록 ‘바담 풍’하지만 아들들은 내 성격과 반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매사에 당당하게 주변을 아우르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나보다야 훨씬 낫지만 아들 두 녀석 다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대 희한하게도 유치원생 내 손자 은성이는 누굴 닮았나, 오늘 보니 끼가 넘치고도 넘친다.

사실 이 녀석의 넉살이야 항상 흐뭇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내 이름은 한 은성인데요, 이제 세 살 이예요.”

음식점에서 미소를 머금고 자기를 바라보는 옆자리 손님이 눈에 띄면, 붙잡을 겨를도 없이 쪼르르 다가가서는 방긋 웃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그러면 손님들은 환하게 웃음 터뜨리기 마련이고, 녀석은 맛있는 것까지 얻어먹고 의기양양 돌아오기가 다반사였다.

또 같은 세 살 때 일이다. 해운대에 사는 사부인이 친정 행사에 다니러온 며느리와 은성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주고 바로 떠났다. 은성이는 우리 아파트 베란다에서 외할머니 승용차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는 뺑글 돌아서며 아내에게 대뜸 말했다.

“강안니 할머니, 내가 할머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해운대 할머니와 광안리 할머니의 손자 사랑 쟁탈전이 은근하다는 것을 세 살 박이 어린애가 어찌 알까마는 아내는 두고두고 감격해 한다.

네 살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때 어린이집에서 난리가 났단다. ‘강은실이 어딨어, 강은실이 나와라!’ 아래 위층 쏘다니다가 교무실에 들어와서도 외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단다. 강은실이는 은성이가 무척 따르는 제 담임선생님 이름이다.

어제 밤, 잔치는 예정보다도 좀 늦게 끝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은성이가 놀랍다는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는다. 어제 만찬이 끝날 무렵 은성이는 일일이 좌석을 돌아다니며 악수를 청했다. 제 딴에는 환호해 준 답례인가보다. 증조할머니와 포옹해서는 할머니의 등까지 토닥거리다니 영 아이의 행동이 아니다.

다음 달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대전 동생의 예비 며느리는 은성이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 아가씨는 재미교포로 인사차 한국에 나온 터였다.

분명한 것은 내 칠순잔치를 시점으로 우리 집안에서는 할아버지인 나는 죽었고, 손자 은성이는 화려하게 날아올랐다는 사실이다.

늦잠을 자버린 바람에 서울행 KTX 열차 예약시간이 빠듯하다고 큰 아들네들이 서두른다. 그 와중에 며느리가 은성이를 붙들고 속삭거린다. 현관문을 나서며 은성이가 한참 주저거리다가 뭔가 손에 쥔 것을 내밀며 아내에게 말한다.

“할머니,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어머니, 은성이가 라텍스 베개 솜을 뜯었네요.”

베개에서 뜯어낸 라텍스 한 움큼을 쥐고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우리 은성이가 말랑말랑한 라텍스가 신기했구나,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

아내가 은성이를 껴안자 녀석은 얼굴을 환하게 펴며

“네, 할머니. 할머니 보고 싶을 때 이걸 볼 께요.”

내가 아이들을 부산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은성이는 내 뺨에 요란스럽게 뽀뽀를 하고는 제 어미의 손을 잡고 개찰구로 내달린다. 그 뒤로 아들 녀석이 양손에 가방 짐을 들고 터덜터덜 따라간다.

승용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으니 은성이의 재잘거림이 아직 남았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니 은성이는 없다. 그런데 뒷자석에 라텍스 한 움큼이 턱 놓여있는 게 아닌가! 바로 그 라텍스 한 움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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