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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기억해야 할 가슴 아픈 역사…관동대학살
신성찬 기자  |  singlerider@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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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03  17: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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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94년전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일본 관동지역에서는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 4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당시 일본 정부 각료였던 ‘미즈노 랜타로’는 정부에 대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계엄령을 내리며 산하 기관에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트리라고 지시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시내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는다” 
 
그날 이후,지옥같은 조선인 대학살이 시작된다.

수천 명의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약  3일간 조선인 사냥에 나선다. 

눈에 띄는 모든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한 결과 그 사망자 수가 최소 6000명에서 2만명까지 이른다고 전해진다.

참혹했던 관동대학살을 목격한 한 일본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 나체에 가까운 250구의 시체가 목이 잘려지고, 기관도 식도, 경동맥이 거멓게 드러났다. 그 가운데서 가장 처참했던 것은 젊은 여자가 배를 갈리어  7~8개월된 태아가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음부에는  쇠사슬과 죽창이 꽂혀있었다 ” 
 
당시 재일 조선인들 대부분은 일제의 토지 약탈정책에 의해 터전를 잃고 살길이 막막해 일본에 건너와 헐값에 노동력을 팔던 가난한 사람들이였다.

일본 유학생으로 건너온 조선인 학생들도 관동대학살로 죽임을 당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학살이 조선에 알려질까 두려워 총독부를 동원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 언론의 검열을 더욱 강화한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는 관동대학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 교과서는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에 대해 조선인 학살의 주체를 모호하게 기술하거나 피해내용을 빠트려 기술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한국정부의 해결의지가 멈춰있는 동안 피해자와 목격자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신성찬 기자 singlerider@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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