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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의 덕[토천(吐天) 장이랑의 동양학 산책]
장종원 선생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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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31  14: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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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학자
사람 됨됨이가 우수한 자는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윗사람들에게는 능력을 인정받기 어렵게 되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배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뛰어나지 못한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됨됨이가 우수한 사람이다. 덕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성이라 하고, 재물로써 여러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을 자랑하며 타인에게 다가서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현을 잊고 남에게 공손하면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현을 내세우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하고, 집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현과 재능을 자랑하는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나라 왕이 강에 배를 띄우자 원숭이들이 놀라 모두 산에 올라서 깊은 숲속에 숨었다. 그중에서 원숭이 한 마리는 도망가지 않고 날뛰며 나뭇가지를 거머잡기도 하고 타고 다니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재주를 오왕에게 보였다. 임금은 이것을 보고 활을 쏘았다. 그러자 원숭이는 그 빠른 화살을 재빠르게 손으로 받아 잡았다. 임금은 다시 좌우의 신하를 시켜 끊임없이 활을 쏘게 했다. 원숭이는 화살을 손에 받아 쥔 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은 친구 안불의를 돌아보며 “이 원숭이는 재주를 자랑하며 빠른 것을 믿고서 내게 방자했다. 그래서 이렇게 죽게까지 된 것이다. 진실로 능력을 드러냄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감을 잃은 자신을 보고 슬퍼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감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이 자기를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슬퍼하고, 또 그 다음에는 남의 슬픔을 슬퍼할 줄 알면서 자기 자신의 모자람을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다. 남의 잘못된 점은 안타까워하면서 본인의 모자람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모자람을 알게 된 뒤로부터는 세상 사람들의 근심이 줄어들고 날로 편안해져 갔던 것이다.

공자는 말하지 않고 도를 얻는 것을 부도의 도라 하고, 말하지 않고 뜻을 아는 것을 불언의 변이라고 하여 불언의 교육을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도를 기본으로 하여 말을 앞세우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덕으로 본다. 바다가 거대한 이유는 모든 물을 사양하지 않기 때문이고, 성인은 낮은 자세로 천지를 아우르고 있어서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지만 천하의 사람들은 그것이 성인의 은택이 어떻게 고루 미치는 것인 줄 모른다. 성인은 살아서는 벼슬이 없고, 죽어서는 시호도 없으며 또 실체의 이익도 그에게는 모이지 않고 그 이름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이를 대인이라 일컫는 것이다.

개는 잘 짓는다고 해서 좋은 개가 아니고, 사람은 말을 잘한다고 해서 현인이 아니다. 그러하다면 누구를 대인이라 하겠는가? 대개 이미 대인이라고 이름난 이는 벌써 참다운 대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덕을 온전히 한 사람을 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크게 갖춘 것이라고 하면 천지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천지가 어떠한 것을 구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절로 크게 갖추어진 것이다. 자기가 이미 크게 갖추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따로 구할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으며 또 내어버릴 것도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성질, 소명과 노력하여 만들어낸 많은 것들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성으로 돌아가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태고의 순박을 따를 뿐이다.

대인은 하늘에 순응해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땅에 순응해서 스스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대인은 세상일을 도모하지 않고 지혜로운 꾀를 쓰지 않으며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다만 천지의 본성을 지키며 세상 돌아가는 현상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자연에 순응하므로 일의 적당하고 적당하지 않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에 인과응보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인과응보가 있다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작위적이고 욕심을 부리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나와 내 자손들의 죄가 아니며 아마 하늘이 내려준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슬퍼만 하는 것이다.

요(堯)는 몹시 악착스럽게도 인을 행하려고 허덕이며 노력하였다. 욕심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인을 행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노력으로 후대 사람들이 서로 인을 행하기 위한 노력의 경쟁을 하면서 혈투를 벌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경쟁의식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백성이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을 하면 마음을 얻기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를 사랑하면 곧 친해지고 그를 이익 되게 하면 곧 달려오고, 그를 칭찬하면 곧 서로 힘써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곧 흩어지고 만다. 사랑과 이익은 욕심이 서린 노력의 댓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의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요는 현인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만 알고 그것이 천하를 해치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때 대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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