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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 교회사 정리, 후대에 작은 디딤돌 되길”[사람, 사람을 만나다] - (161) 이상규 고신대 교수
김효진 기자  |  khi5018@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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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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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규 고신대 교수가 부산지역 교회역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와 방법, 주요 선교사들의 행적에 관해 설명했다.

국내외 자료 섭렵 ‘부산지방 기독교 전래사’ 출판
미국·호주 선교사, 부산에서 교육·의료 활동 전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 사회 변화, 사상, 문화 등 인간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복원함으로써 인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지표로 삼으려는 것이다. 역사학의 분야는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역사학 중에서 기독교 역사를 전공했으며 특히 부산지역 기독교 역사를 깊이 연구한 고신대 이상규(영도구 동삼동) 교수를 만났다. 이상규 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부산지역 교회역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와 연구방법, 주요 선교사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 어떻게 부산지역 교회역사를 연구하게 되었나요?

▲ 제가 부족하지만 교회역사를 공부하면서 서양의 기독교와 한국의 교회역사를 연구하다 보니 부산·경남 지방 기독교 역사가 제대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 55년 전인 1963년에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에 계시던 김의환 교수가 ‘부산의 기독교 布敎考’라는 논문을 ‘항도부산’ 2호에 발표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부산지방 기독교 연원에 관한 첫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기독교 기원에 대한 자료제시 정도였고 또 약간의 오류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 이후로 별다른 연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1983년부터 고신대에 부임했는데, 부산과 경남지방 기독교 역사가 미개척 분야이기 때문에 이 지방교회사 연구도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 과정에서 1980년대 이후 개별 교회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저에게 여러 자문 요청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문에 응하다 보니 이 지역 교회사를 좀 더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 교수님은 어떻게 혹은 어떤 방법으로 이 지역 교회사를 연구하게 되었습니까?

▲ 역사 연구에 있어서 일차적인 작업은 자료 혹은 사료의 수합이지 않습니까?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선 사료를 모으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 중심으로 말하면 불과 180여 년 전인데,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고 망실되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외에 눈을 돌렸지요. 물론 우리나라에도 역사 기술의 전통이 있지요. 연산군이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역사 뿐”(人君所畏者史而已)이라고 말한 것은 역사기록의 힘을 알고 있었고, 또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하되 4대 사고(史庫)를 설치했던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분명한 역사 인식이 있었습니다만 기독교 관련 자료는 절대 수가 망실되었습니다. 그러나 내한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본국으로 가져갔고, 외국 도서관이나 고문서관(Archives)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사를 전공하면서도 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일단 호주로 가서 호주 멜버른, 시드니, 브리즈번 등지를 다니며 도서관, 고문서관 혹은 선교사들의 후손을 찾아다니며 부산·경남 지역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요. 이 자료에 근거하여 이 지역 교회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된 것이지요. 부산지방은 1913년까지는 미국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가 공동으로 선교했던 곳이기 때문에 양 선교부가 관리하는 자료가 주요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부산·경남 교회사를 정리하게 되셨군요.

▲ 그렇습니다. 물론 호주 자료에만 의존한 것은 아닙니다. 국내외의 문헌을 섭렵하고 증언이나 구술 자료도 확보하여 2001년에 ‘부산지방 기독교 전래사’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이 지방 기독교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고, 여전히 많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개척자적인 연구를 하게 된 것이지요. 그 외에도 여러 논문이나 논설을 썼는데, 후대의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합니다.


- 예로부터 부산은 어업 종사 인구가 많아 다양한 미신의 세가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기독교와 접촉이 어렵지 않았을까요? 또 이곳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어떤 분들이었고 주로 어떤 방식의 선교 활동을 하셨는지요?

▲ 부산지역은 바다를 연하고 있는 항구이자 해안 도시이기 때문에 해안성 미신이 많습니다. ‘미신’이라고 말하면 마음 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해안성 민간신앙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 다수가 어민인 부산의 주민들은 자기보위를 위한 토착종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소개되던 1890년대 이런 영향은 예상보다 강력했습니다. 이런 점들이 기독교 복음에 대한 저항 세력이었습니다. 또 부산은 일본과 인접해 있어 천리교(天理敎) 등 왜색종교의 영향이 컸고, 불교의 영향력도 컸습니다. 현재에도 전체 종교인구의 67.7%가 불교도인데 약 110만 명 정도 됩니다. 이런 점이 초기 기독교가 당면했던 현실적 제약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단순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교육과 의료 활동을 중시했는데, 1895년에 설립된 일신여학교는 한강 이남의 최초의 여자학교였고, 1903년 9월에는 부산지방 최초로 근대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정킨기념병원은 한국인들에게는 그냥 서양인 병원으로 불렸지요. 부산에서는 일신여학교 외에도 비록 소규모였으나 한문학교, 규법학교 등을 세워 기독교 선교를 전개했고, 또 구제와 자선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이 지방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호주 빅토리아 출신 선교사들이었는데 1891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21명도 부산을 거쳐 갔습니다. 대부분 유능한 목사이거나 의사 혹은 교육자였습니다.


- 부산에서 일했던 선교사 중에 특별히 중요한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일까요?

▲ 호주에서 온 첫 선교사인 데이비스는 부산 도착 다음날인 1890년 4월 5일 사망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재개하여 126명이 내한했으니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 할 수 있죠. 캐나다인 게일은 한국문화를 연구하여 한국학을 개척한 분인데, 부산에서 1년 6개월간 일했습니다. 후일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를 설립했던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유명한 교육 선교사였는데, 부산에서 약 5년간 활동했습니다. 또 미국출신인 어빈은 어을빈(漁乙彬)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1911년 이후에는 선교사 신분을 내려놓고 동광동에 병원을 설립하였고 만병수라는 만병통치약을 개발한 분이기도 합니다. 의사이자 목사였던 매켄지는 부산 감만동에서 그리고 후에는 용호동 지역의 나병 환자를 위해 30년간 상애원에서 봉사했던 거물급 선교사였습니다. 그분의 두 딸 헬렌과 캐드가 설립한 병원이 1951년 설립된 일신병원입니다. 어느 한 분 귀하지 않은 분이 없지만 이분들이 부산에서 활동했던 외국인 선교사 중에서도 비교적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 최초로 세례를 받은 부산 사람은 어떤 분입니까?

▲ 호주선교사들은 지금의 동구 좌천동에 선교관을 매입하거나 건립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했습니다. 첫 개종자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데, 그들이 심상현이라는 남성 한 분과 이귀주, 이도념이라는 두 분의 여성이었습니다. 세 분 다 호주 선교부 관할 하에서 고용된 인물이었습니다. 심상현은 멘지스 선교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던 어학 선생이었는데 한학(漢學)에 밝으면서도 서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분이었고, 다른 두 여성은 호주 선교부가 시작한 고아원 보모였습니다. 이들이 세례받은 날이 1894년 4월 22일이었는데, 집례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였습니다. 우리 이름으로 배위량이라고 불렀지요.


- 기독교 역사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내셨는데 이번에 ‘왕길지의 한국선교’라는 저서를 출판하셨죠? 어떤 책입니까?

▲ 왕길지(王吉志)라는 분은 독일 사람이고 본명은 겔손 엥겔(Gelson Engel)입니다. 본래 인도에서 활동한 선교사였어요. 그런데 인도에서 호주 여성 클라라 바스(Clara Bath)를 만나 결혼하고 호주로 이민했는데 곧 한국의 선교사로 오게 된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독일산(産) 호주적(籍) 한국 선교사’라고 불렀는데, 언어능력이 탁월했어요. 12개국의 언어를 불편 없이 사용했으니까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 고전어와 영어, 불어 등 현대 유럽 언어, 인도어, 뱅갈어 등 인도 방언을 알았고 내한 후에는 한국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도 공부했을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산에 거주하면서 부산·경남 지방에서 일하다가 1919년 평양으로 옮겨가 그곳의 첫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에서 교수로 일하신 분인데, 한국에서 구약성경개역, 찬송가 편찬, 교회 기구의 대표로 일하는 등 한국 교회에 큰 기여를 했고, 부산의 부산진교회, 수안교회, 기장교회 등의 담임목사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설립한 분입니다. 특히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종교개혁 찬송으로 알려진 “내주는 강한 성이요”로 시작되는 루터가 작사·작곡한 찬송을 조선어로 번역한 분이 바로 왕길지 선교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분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숭실대의 지원을 받아 전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남긴 일기도 번역하여 편집하였지요.


- 2012년에 ‘올해의 신학자상’을 수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존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상입니다. 1983년 고려신학대학 신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현재까지 오직 교회사학 연구에 몰두하며 재직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한 길을 걸어왔다고 주신 상인 것 같습니다.


- 교수님의 신앙역사도 궁금합니다.

▲ 초등학교 때 모친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 어머님은 전쟁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으신 분입니다. 위로 시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남편 잃은 자부와 손자, 그리고 어린 5남매를 키워야 하셨으니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단하셨으나 어린 자식을 두고 갈 수 없어 궁리 끝에 예수를 믿으면 소망이 있을까 하여 아랫동네의 교회로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남의 이목이 두려워 밤에 찾아가셨지요. 시부모님 몰래 믿음 생활을 하셨어요. 제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제 할아버지께서 한의사이셨거든요. 아들 병도 못 고쳤다고 자책하시면서 한의사 일을 접고 농사를 지으시었는데 집안이 늘 가난했습니다. 인품은 선하고 정직했지만 유학(儒學)에 깊으셔서 기독교 신앙을 용인하시기는 힘드셨을 겁니다.


- 신학을 전공하시게 된 데는 신앙의 역할이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만 평생 공부만 하신 것은 운명일까요?

▲ 어머님이 제 신앙의 인도자였다면 나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신 분은 할아버지라 생각됩니다. 한학자이기도 하셨던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동네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셨어요. 아침 이른 시간에 동네 청년들이 한문책을 가지고 우리 집 사랑방으로 찾아왔고 할아버지는 긴 담뱃대를 물고 한문책을 크게 읽으시면서 따라 하게 하시면서 뜻을 풀어주며 가르치셨죠. 당시 독서법은 성독(聲讀)이었어요. 덕분에 나도 옆에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천자문(千字文)에서 시작하여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까지 배웠습니다. 할아버지가 뜻을 설명해 주었으나 단순 암기에 불과해서 오래 가지 못했지만 그때 한문을 배운 게 큰 재산이 됐어요. 한자 배우기 외에도 늘 책을 읽으시고 공부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암암리에 나의 학구 여정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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