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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열정이 만든 ‘부산 공무원 시인 1호’ 영예[사람, 사람을 만나다] - (146) 배상호 시인
김효진 기자  |  khj@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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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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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상호 시인이 시에 대한 철학과 문학기념관 설립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과 꿈 두 마리 토끼 잡아… 올해로 등단 30주년
‘아버지의 정원’, 소월문학상 수상… 문학관 설립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시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은퇴 후에는 문학기념관까지 건립·운영하면서 ‘문예시대’라는 문예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배상호(78·서구 까치고개로) 시인을 만났다. 현재 그는 후학들에게 시작(詩作)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무려 2200편에 달하는 시를 쓴 다작의 작가다. 한 가지 일을 하기도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추진하는 삶을 살고 있는 향토 시인 배상호를 만나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 문학에 뜻을 두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는지?

▲ 저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가 고향입니다. 일본 복강현에서 태어나 6살 때, 그러니까 해방되던 이듬해 징용으로 끌려갔던 아버님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찾아간 고향은 너무나 실망스러웠고, 가난과 고통이 우리 다섯 식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당장 끼니 걱정을 하면서 힘든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거기다 기거할 집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부모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저는 7살에 중남초등학교에 입학해 헐벗고 굶주리며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동기생 100여 명 중 가장 가난했던 저는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가사를 도우며 지냈습니다. 그 당시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형님께서 6·25동란 때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경찰공무원으로 함안에서 공직을 시작하면서 저를 데려가 함안농업고등학교에 입학을 시켜 3년 동안 타향에서 공부하며 어렵게 지냈습니다. 이때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님을 도와(아버님은 작고) 농사일을 하면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집을 읽으며 나도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부터는 습작시를 열심히 쓰게 되었습니다.


- 등단지와 등단 연도는?

▲ 저는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김소월 시에 매료되어 그저 일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시를 쓰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1965년도 10월 공무원이 되어 고향인 삼남면 면사무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5년 후 부산직할시로 전입을 와서 서구청에 근무하면서 청마(靑馬) 유치환 선생님의 제자이신 이석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1987년 가을 ‘시와 의식’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등단과 동시에 그동안 써두었던 시들을 묶어 그해 10월 첫 시집 ‘이별하며 사는 세상’을 출판하여 공무원 시인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있었는지.

▲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1965년도에 경상남도 제1회 지방공무원 공개경쟁시험(농업직)에 응시해 26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되어 일생동안 공무원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면사무소에서 농정업무를 담당하다가 1973년 10월 부산시로 전입해 와서 서구청에서 도시행정을 수행하면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저는 공무원을 천직으로 알고, 못 배운 것을 만회라도 하듯이 열심히 해서 윗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인사, 기획, 새마을업무 등을 주로 담당하였고, 마침내 사무관 승진시험에도 합격해 서기관으로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저는 시를 쓴다고 업무를 소홀히 한 적 없고, 시는 주로 새벽 2시에 일어나 3시간 정도 쓰기도 하고, 남의 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5시가 넘으면 2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가 출근하는 습관을 길렀고, 시는 어느 한 날에도 쓰지 않고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늦게 등단한 편이지만 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멀고 먼 세월을 달려왔습니다. 제가 등단한 1987년도에는 부산시청 산하 시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부산시 공무원 1만5000여 명 가운데 최초로 공무원 시인 1호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부산에서 잡지가 잘 안 되는 줄 아는데 24년 동안이나 ‘문예시대’를 발행해 오셨습니다. 숨은 이야기가 있다면?

▲ 저는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바람에 5급 승진시험 준비가 늦었고, 거기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 행정학 등 어려운 과목들을 이수하는데 두 번의 쓰라린 고비를 경험한 끝에 마침내 사무관이 되었습니다. 사무관이 되어 서구청 초대 문화공보실장으로 발령을 받아 문화행정을 담당하면서 이때 구상한 것이 문예지 발간이었습니다. 부산에 수많은 잡지가 태어났다가 없어지는 사실을 알고 문예지 발행을 문학운동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 ‘문예시대’였습니다. 퇴직 후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결과 문예지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공보처에 등록수속을 밟아 등록을 완료하고, 일광인쇄소 송성조 사장님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지령 91호(2017년·봄호)까지 내는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자금 관계로 잡지사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부산문인들의 끊임없는 후원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저의 눈물과 땀, 열정으로 이룩한 문예시대는 부산 최고령 문예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문예시대를 발행하면서 부산 최초로 작가상을 제정하여 작품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들을 발굴하여 지금까지 18회 55명의 수상자를 내었고, 중국 조선족 문인들에게 해외동포 문학상을 제정하여 8회 8명에게(상금 200만 원) 시상을 해왔으며 문예시대 문학상을 제정하여 故 문병란 교수 등 국내 저명한 문인들에게 시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예시대는 문인들에게 지면을 제공하고 대중문화의 저변확대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고되고 어려운 길을 신념 하나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작품 활동도 열심히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인지요?

▲ 저는 세 가지 좌우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깨끗하게 살자, 두 번째 부지런하자, 세 번째 거짓말을 하지 말자입니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몸은 매일 목욕을 하고, 정신은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지런하게 살자는 제가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었고, 그 부지런함은 저의 어머니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일평생 공직을 수행하거나 문학을 하면서도 게으르지 않고 다작을 위주로 시를 열심히 써왔습니다. 저는 이런 정신으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시집 17권, 영역시집 1권, 수상시집 1권, 시선집 1권과 명시감상 1권, 신불산연가(퇴임문집) 등을 발간해 왔습니다. 제17시집까지 발표된 시는 2200여 편이 되기 때문에 최소한 등단 이후 격년제로 시집을 한 권씩 펴낸 셈이 됩니다. 특히 제16시집 ‘아버지의 정원’은 총 365편의 시가 실렸고, 이 시집으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문단경력으로는 부산시공무원문인회 창립 초대회장, 한국가람문학회 창립 초대회장, 부산시인협회 부회장, 부산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연임) 및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농민문학회 부회장을 맡아 나름대로 문학 활동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현재는 경제풍월에 매달 시를 한 편씩 발표하고 있고, 서구문화원 문예창작반에서 매주 시 강의를 하며 후배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 ‘시인은 많은데 시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선생님의 시의 경향과 시 세계는 어떠한지.

▲ 저는 시가 어려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는 쉬워야 됩니다. 쉽게 씌어 진 시가 결코 수준이 낮거나 함량 미달이 아닙니다. 쉽게 쓴 시야말로 고도의 수사적 기법을 구사해야 되고, 평소 시인의 철학과 경험이 녹아있어 누구라도 읽으면 공감이 가고 대리만족을 줍니다. 시는 퇴고를 하고 나면 시를 쓴 시인의 소유가 아니라 바로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읽고 감동을 받아야만 좋은 시가 되는 것입니다. 시집들을 보면 설익은 언어들을 마구 쏟아내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시들이 판을 치기 때문에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는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시를 쉽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를 쉽게 쓰면서도 인생의 철학과 경험, 가난과 어머니, 공직의 생애와 보람, 순수자연과 하나 되는 제재들을 형상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읽어도 쉽고 이해가 빠른 일련의 시들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 몽포 배상호 문학기념관에 예상보다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문학관 설립 배경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 2014년 4월 16일 서울에 있는 모 문학관을 방문하고 오면서 나도 그동안 수집한 자료(시집, 잡지, 도자기, 그림, 쓰던 물건, 생활기록부, 발령장, 상장과 상패 등)가 만만치 않은데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속으로만 가슴앓이하던 차에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이때부터 문학관을 만들 부지와 건물을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달여 만에 그리 크지도 않은 주택을 매입하고 수리를 거쳐 동년 10월 20일 문학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수집한 자료들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 문학기념관에 중요한 자료가 많은데 몇 가지만 소개해 주시죠?

▲ 문학기념관이기 때문에 시집 5000여 권, 문학잡지 3000여 권, 전문서적 등 기타 2000여 권, 도자기 40여 점, 서화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제가 오래도록 보존해온 것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통신표와(67년 이상 되었음) 졸업장, 고등학교 급장 임명장, 우등상장과 졸업장, 1967년 1월 10일 결혼 때 우인 축사, 초청장, 축전 등이 있고, 공무원 발령장 및 임명장, 상장, 훈장증, 평소 사용했던 넥타이핀과 손목시계 시화 40여 점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현재 다른 문학관에 가면 실질적으로 그 당시 주인공이 사용하던 물건은 별로 없고, 책이나 사진을 인화해 벽에 걸어 전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생동안 사용했거나 가지고 있던 물건들과 자료를 종이 한 장이라도 필요한 것은 후세에 남기기 위해 소중하게 보관해온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자료의 가치와 보존에 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 문학기념관 운영계획과 평소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면?

▲ 우선 박물관으로 등록해서 부산시민이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산문인 1300명 중에 자비로 문학관을 만든 것은 제가 처음이기 때문에 앞으로 유럽의 유명한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처럼 개인 기념관이 많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문학기념관 운영은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하다가 죽기 전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헌납할 생각입니다.


- 3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문학상들인지?

▲ 저는 상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문인이면 누구나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지 상을 받는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합니까? 저는 올해로 등단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그동안 초허 김동명문학상, 새한국문학상, 한국농민문학 작가상, 해외에서 받은 연변작가협회상, 장백산 세계문학상, 길림시 도라지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나 그중에서 2015년도에 받은 김소월문학상은 부산문인 중 제가 최초로 수상하였고 김소월에 매료되어 시를 써온 지 50여 년 만에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한편으로 영광스럽지만 어깨가 무겁습니다.


- 문단에 대한 시각과 후배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중앙 문인이나 지방문인할 것 없이 패거리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쓰라는 글은 쓰지 않고 기성 정치인들 흉내나 내면서 회장 자리를 놓고 싸움하는 모습을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문인이면 누구 할 것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 20년대 30년대 선배문인들처럼 소박하게 글이나 쓰고, 글로써 승부수를 띄우는 참다운 문인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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