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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멋진’ 신세계[리더스 칼럼]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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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2  16: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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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보경 시인

수저의 재질과 색깔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요즘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나의 숟가락은 작고 갸름한 얼굴을 가진 스테인리스 숟가락이었다. 손잡이 부분에 작은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어린 눈에도 얼마나 특별하고 예뻤는지 모른다. 숟가락을 쥘 때마다 손바닥에서 파닥이는 날갯짓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수저통 속에 한꺼번에 수저들이 뒤섞여 있어도 날개 달린 내 숟가락은 쉽게 눈에 띄었다. 은빛 날개 문양이 빛나는 이름표처럼 멋졌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라는 말이 있다. 은으로 만든 식기를 사용하는 유럽 귀족층이 아기에게 유모의 젖을 은수저로 먹이던 풍습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아마도 은수저가 음식의 독성에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식기로 선택한 것에서 나온 말이라 추측한다. 어쨌든 은수저는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신분과 계급을 드러내는 은근한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내게도 결혼할 때 마련한 은수저가 있었다. 쓰기에 불편하고 만만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은수저가 지닌 광택과 빛깔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조금만 소홀히 다루어도 특유의 환한 낯빛이 금세 어두워진다. 은이 지닌 특유의 광택과 품위를 잃지 않도록 잘 갈무리해 주어야 한다. 은수저가 귀족이고 상전이다.

갈수록 계층이동의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이 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더는 믿지 않는 세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력을 통해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매우 높다’와 ‘비교적 높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1995년 이전보다 훨씬 낮아졌다고 한다. 특히 결혼과 출산 결정 연령대인 30대의 경우 10명 중 6명이 부정적 응답을 했다고 한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점점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 사이에 수저의 색깔이나 재질의 대물림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어떤 수저를 들고 태어나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태생이라는 말 속에는 어쩌지 못하는 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벽이 있어서 그 벽을 넘어서거나 깨뜨릴 수 있는 용기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벽의 존재는 절대적인 체념과 절망의 메타포가 아니다. 전력투구의 동기와 이유가 될 수 있다. 벽은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숟가락일 뿐인 숟가락에도 불가능과 포기라는 벽을 쌓는 세상이다. 숟가락에 태생이라는 고정불변의 계급장을 달아준다. 선택자유의 숟가락으로 선택 불가라는 불가항력의 벽을 쌓는다. 스스로를 불가항력의 벽에 가두고 서로를 등진 채 고집스러운 벽이 되어간다. 수저의 선택이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유전자처럼 요지부동의 태생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은수저와 날개 달린 숟가락 말고는 내게는 ‘내 것’이라 정해 놓은 수저가 없다. 식구들의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면 수저통에서 집히는 대로 편하게 사용하고 잘 씻어 다시 사용한다. 수저가 삶을 결정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무난하고 평범한 수저를 집어 들 것이다. 그런 삶이 가장 평화롭고 아름답다. 또한 숟가락이 나의 신분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근거라면 딱히 ‘내 것’이라는 숟가락이 없는 나는 수저계급론적 입장에서 분류하면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또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자유로운 무소속이다. 그러나 세상이 보는 나의 신분은 이도 저도 아닌 부랑자일지 모른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올더스 헉슬리는 서늘한 두려움을 주는 계급사회를 이야기한다. ‘멋진’ 신세계는 고도의 과학기술로 철저하게 인구를 조절한다. 신세계의 인간들은 자연출산이 아닌 실험실의 배양병에서 태어난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각자 계급이 정해지며 그 계급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까지 철저히 만들어져서 태어난다. 그런 신세계의 인간들에겐 자기가 만들 삶이 없다. 삶에 대한 어떤 시도도 없다.

우리의 ‘금수저와 흙수저’ 속에도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보다 ‘더 멋진’ 신세계가 담긴 것인지 모른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더 멋진’ 신세계에 갇혀 태생의 수저를 원망하고 부모들의 잘못된 유전자 선택을 비난하느라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을까 섬뜩하고 두렵다.

언제든 버리고 얼마든지 원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숟가락이다. 스스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태생이라는 멍에를 씌우는 것은 일종의 어리석은 자기학대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도 오늘의 숟가락을 들여다본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오늘이 평범하고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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