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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하우스를 식당으로 둘 수는 없다[리더스 칼럼]
김효진 기자  |  khj@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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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19  1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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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화(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전쟁 중 부산은 1023일간 대한민국의 피난임시수도였다. 부경대에 워커하우스라는 건물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돌집’이나 ‘미국 장군의 별장’이라고 불리었던 곳이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밤에 그곳에서 입시공부를 했던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부산발전연구원 주최 ‘피난임시수도 부산’ 중 ‘한국전쟁과 워커하우스’를 발표한 적도 있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비극 중 비극이었다.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기습 남침하였다. 미 제24보병사단은 재래식 무기로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단장인 딘 소장은 대전에서 행방불명(후에 포로로 송환됨)되었고, 개전한 지 한 달 만에 낙동강 동안과 남안만 남겨두고 전 국토의 거의 90%를 점령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항을 통하여 병력과 무기가 수송될 때까지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버티면서 결정적인 때를 기다렸다.

웰던 W. 워커 중장은 낙동강은 한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2개의 워커라인(X라인과 Y라인)을 긋고서 자신은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며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는 전장을 누비면서 “낙동강에서 물러서지 마라”고 장병들을 독려하였고, ‘일어서느냐, 죽느냐(stand or di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적을 낙동강 이남으로 남하하지 못하게 하였다.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여 통일시키라고 독촉하였지만, 북한군의 전투기가 궤멸되어 병력과 무기의 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은 워커라인 중 X라인은 돌파되고 Y라인의 윗부분인 왜관과 포항전투에서 패하여 힘든 전투가 전개되었다. ‘야인시대’라는 연속극 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워커 장군이 워커라인을 아래로 그어 남하한 것을 불평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워커 장군은 기존의 방위선인 데이비드선라인(울산-삼랑진-마산)에 비해 훨씬 위쪽인 영덕-상주-마산 또는 포항-왜관-마산을 잇는 긴 전선을 고수하여 북한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인천상륙작전을 돕게 구상한 것이다.

대구역까지 포탄이 떨어지자 미 제8군은 그들이 가진 통신장비 텔레타이프가 적의 수중에 넘어갈 경우에 극동지역에서 당장 이러한 장비를 구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사령부를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으로 이전하였다. 이기대 등 남구지역의 바닷가에서 돌을 모아 대학 내에 벙커형의 작전지휘본부 건물을 지었다. 이곳은 낙동강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18일 동안 전쟁을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미8군은 적의 통신 암호까지 해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영산전투에 위기가 있을 때 투입되었던 미제1해병여단은 적을 괴멸시킨 후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용호3동 콩밭에 텐트를 치고 대기하였다. 영천을 점령했던 북한군 2군단의 15사단은 영천 깊숙이 들어와 국군 2군단에게 포위되어 궤멸되면서 한국전의 양상은 달라져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이 상륙작전은 맥아더만 크게 부각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했던 워커 장군의 공로가 묻히며 지냈던 점은 유감이다. 6·25한국전쟁 부산교두보전투(일명 낙동강전투)의 영웅인 유엔군 지상군사령관이자 미 제8군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1950년 7월에 맥아더 원수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와서 12월 23일에 교통사고로 순직할 때까지 한국의 채류기간은 6개월도 채 안 되어 그의 공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 UN평화기념관에서 워커 장군의 특별기획전을 열기도 하여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부산에는 1950년 9월 5일부터 미 제8군사령부가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으로 이전하여 그가 지휘했던 작전지휘본부였던 워커하우스만 남아 있다. 그는 한국을 자유민주국가로 남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를 이어 대장이 된 아들 샘 워커 대장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정책’에 반기를 들고 그 정책의 철회를 주장하다가 강제로 예편되었다. 그러고 보면, 워커가(家)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한 집안이 없을 것 같다.

부산수산대학은 1950년대 미군들에 이어 스웨덴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다. 1957년 영도 가교사에서 돌아온 학교당국 조차 워커하우스의 용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수산대 50년사나 부경대 70년사에도 이곳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바닷물이 닿는 곳에서 불과 3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서양식 건물로 세워진 워커하우스는 시련도 많았다. 학교를 다시 찾고서 1960년대 이후 학교경비원의 본부, 창고, 교수-학생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1981년부터 대학의 동아리방으로 이용되다가 1990년 여름에 화재가 나서 벽체 외 소실되었다가 1995년 9월 29일에 준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예전과 달리 지붕의 색깔이나 높이에서 원형과 다소 차이가 있다.

역사는 잊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인 것 같다. 6.25전쟁의 참상과 유엔군의 고마움을 잊어가고 있다. 워커하우스가 1950년 9월 낙동강전투의 마무리를 지휘했던 작전지휘본부라는 사실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세인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은 역사적 사실을 새겨 사적지로 고시되어야 마땅하다. 부산교두보작전의 작전지휘본부인 워커하우스를 대학의 식당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현재 워커하우스를 포함하여 근대부산의 유적지 12곳을 유네스코에 인류의 유산으로 등록하고자 준비 중에 있다. 이 일이 잘 성사되어 워커하우스도 잘 보존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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