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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미친다는 것[리더스 칼럼]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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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09  16: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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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보경
   시인
 

가끔 ‘미친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다. 아타리 창업자인 놀런 부시넬은 ‘미쳤다’고 수군거림을 받는 사람 중에 오히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많다고 했다. 창의적인 사람과 미친 사람은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를 여행할 때였다. 고성 박물관에 전시된 고색창연한 보드게임을 본 적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보드게임의 하나라는 걸 대번에 알아보았다. 보드게임이 취미벽을 넘어 삶의 동반이 되어가고 있는 아들 덕에 생소하던 보드게임에 대해 소소하게 알게 된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나비예찬론자다. ‘나비’를 읽으며 그가 엄청난 나비수집가이고 나비애호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자전적 성장소설인 ‘공작나방’에서는 나비에 미치듯 몰입했던 어린 헤세를 만날 수 있다. 극단적 수집가는 수집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공작나방’을 읽는 내내 극단적인 수집벽이나 취미벽을 가진 사람들이 수집 대상에 대하여 얼마나 깊숙이 몰입을 하는지 알게 된다. 미친 듯 몰입하는 남다른 열정에 막연한 경외심마저 느낀다.

무언가를 열심히 수집한다는 것도 무언가에 미치는 일이다. 책 수집가였던 존 백스터는 ‘책사냥꾼’이라는 책에 미친 책을 썼다. 수집이라는 말 대신 선택한 사냥이라는 말은 강하고 저돌적이고 필사적이다. 이미 미친 듯한 소유욕과 애착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던 백스터도 어느 날인가 기를 쓰고 수집한 그레이엄 그린의 책이 불현듯 무겁게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린의 책을 처분하기로 한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희귀한 고서를 찾아 수집하시던 교수님을 만났다. 그분의 고서 사랑은 특별했다. 그 분의 서가에 엄청나게 꽂혀 있던 고서적에는 시간이 축적한 아름다움과 창연한 기품이 있었다. 그러나 따끈따끈하고 싱그러운 잉크냄새 나는 신간이 더 끌리는 내게 고서에서 풍기는 오래된 냄새는 그닥 향기롭지 않았다. 오히려 축적된 피로감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좋아하는 것도 쌓일 정도가 되면 부담스럽다. 어떤 것이든 쌓이고 쌓이다 보면 투명성을 잃고 어두워지기 십상이다. 쌓인다는 것은 욕망의 축적이고 지나치면 부패의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적절함의 경계를 지키며 중도를 걷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지금껏 끈질기게 한 분야를 파고들거나 빠져본 적이 거의 없는 탓에 무언가를 열심히 모으고 정리하고 보관하고 끝까지 지키는 일이 내게는 마치 벅찬 중노동처럼 여겨진다. 무언가에 미치듯 빠져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그런 내가 아들의 남다른 수집벽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쉽지는 않다. 무언가에 미칠 줄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행복할 거라고 무작정의 주술을 걸어본다.

아침이면 제법 코끝이 시리다. 한겨울의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꽃보다 붉고 화사한 잎사귀 몇 개만 달고도 아직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조만간 남은 몇 개의 빛나는 순간들과 마저 결별하기 위해 지금 나무는 미치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미치듯 햇살을 모으고 바람을 모으고 땅의 기운을 모으고 모아 떨켜를 완성하는 나무들, 온몸에 돋은 나무의 떨켜는 미침의 절정이다. 미침의 절정에 이른 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비로소 자유롭고 편안해질 것이다. 단단한 떨켜는 미침의 마지막이자 미침의 다음과 다음이 되어 줄 것이다.

돌아보면 내게도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물건을 쉽게 폐기하는 버릇이다. 가끔 버리지 말아야 했을 것마저 버리고 낭패를 겪을 때가 많다. 쉽게 버리는 나의 습벽도 아들의 수집벽 못지않게 쉬 버리지 못하는 습벽이다. 그러니 유별난 수집벽을 가진 아들과 유별난 수집기피벽을 가진 내가 서로의 습벽을 적당히 퉁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난해하고 남다른 취미에 몰입하는 사람일수록 잠재력이 큰 인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독특한 취미가 있는 사람은 지식과 견문을 넓히는 열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들을 염려하는 내게 위로가 되는 말이다.

무수한 떨켜를 만드는 나무의 지혜로움을 생각한다. 지금보다 좀 더 단단해진 다음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에 미치듯 잠시 빠져보는 일도 나쁘지는 않다고, 한 번 더 내게 주술을 걸어본다. 텅 빈 가지마다 도드라진 떨켜가 유난히 단단해 보이는, 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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