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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일"[사람, 사람을 만나다] - (70) 수필가 한인환
일간리더스경제신문  |  ileaders@leader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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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21  13: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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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주어진 순간의 생각이나 사실들을 표현하는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선 주변의 일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사고를 요한다. 사실에 대하여 전문적이고 초능력을 가진 독자가 돼야 한다. 한인환(66·수영구 남천동)은 전직 고등학교 화학 교사로서 일상의 일들을 남다른 관찰력으로 표현하는 분이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바쁘다는 구실로 주변의 여러 일들을 무심히 넘기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반드시 생각해야하고 필요한 일들도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면 무시하고 살아간다. 글 쓰는 사람 한인환을 만나 글쓰기의 의미와 그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  자연과학을 전공하셨는데 대단한 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무엇입니까?

화학 선생으로 평생을 보낸 것을 두고 자연과학을 전공했다고 하시는데, 사실 좀 듣기에 그렇습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비롯하여 대학 4년간 쉬며 놀며 학점 따기에 급급했는데 무슨 전공까지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대학 때 습득한 전공지식보다는 고등학교 때 대입을 위해 공부한 과학 실력이 화학선생으로의 밥벌이에 훨씬 도움이 되었지요.

중고교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한두 번 참방 정도로 간신히 입상한 것과 군복무 중에 왕고참의 연애편지를 시리즈로 대필해준 공로로 생긴 든든한 빽을 과시한 적은 있습니다. 칼빈소총 사격에 불합격하여 눈물고지로  꽥꽥 오리걸음한 전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폭력보다는 필력이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구순이 넘으신 노모가 계십니다. 지금도 늙어가는 육남매 자식들을 자유자재로 가히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루십니다. 그 총기며 재치가 제가 봐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만일 제게 약간의 필력이 있다면 이런 양반의 장남으로 태어난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요.


- 일상에 대한 관찰이 뛰어납니다. 별도로 공부를 하십니까?

아내에게 나는 영원한 ‘둔치’입니다. 매사에 둔해 빠져서 갑갑하다 못해 열불 나는 때가 하루에도 셀 수가 없다고 하네요. 아내가 방금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옷을 새로 샀는지 무엇 때문에 기분이 저기압인지 도무지 알아채지를 못하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합니다. 타고난 둔치가 공부를 한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노력을 한다 해도 잠시 그때뿐 사람만 피곤해질 따름입니다.

다만 재주 하나는 있나봅니다. 로또복권 1등에도 이미 여러 차례 당첨 되었습니다. 이 당첨금으로 무엇을 할까? 아들내외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야지. 아내에게는 미적거리다가 그만 들켜 버렸답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아내 앞에서 쩔쩔매다가 몽땅 통장 째 압수당하며 혼자 웃고 울고 합니다.

발 시린 한겨울 별빛도 얼어붙은 전방초소 새벽, 그 길고긴 졸병의 보초 시간에 나의 망상은 잉태되었고 그게 점점 자라 이제는 망상에 망상을 줄줄이 실감나게 하는 재주가 되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기록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십 여 년 전에 교회 50년사를 책임지고 편집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옛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교회 초창기 믿음의 선배들이 쏟은 열정과 눈물을 되살려 감격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느꼈던 감격을 이 책을 읽게 될 후대의 사람들도 공유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기록이야 말로 사람과 사람을 종횡으로 이어 사람이 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며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게 된 후부터 인류의 연속성에는 생물학적 DNA가 필수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른 동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이 없다면 내가 조상의 발자취를 알 수 없듯이 후손이 나의 존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오늘을 잠시 살다가는 한낱 영장류에 지나지 않겠지요.

문자든 영상이든 기록으로 남은 개인 삶의 족적들이 기록으로 모이고 다음 세대로 전해져서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문화라는 게 다 기록의 터전 위에 쌓아올려져 꽃 핀 것이라 생각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의 기록이 없다면 우리가 신의 뜻을 어떻게 알까요?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남다른 기록 문화를 지녔다는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공생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지런한 악어 이빨 틈에는 찌꺼기가 많으니 악어새도 많이 날아들어 붐비겠지요. 반면에 게으른 악어에게는 먹을 것이 없으니 악어새는 날아가 버릴 테고, 그러면 머쓱해진 악어는 겨우 남아있던 악어새까지 깨물어 잡아먹으려 들지 모릅니다. 요즘 자기 돈 들여 출판해서 일일이 손수 우표 붙여 증정해도 코웃음만 칠뿐 통 읽어볼 생각조차 안하니 작가와 독자 누구 잘못이 더 큰지 걱정되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날더러 신문 칼럼 란에 수필 몇 편 투고했다고 이런 질문을 하시면 내 경우는 애당초 무능하여 초라해진 악어라 유구무언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적으로 돌팔이 필자의 책임이라 좀 어리숙한 독자가 걸려들기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실토하겠습니까.

참, 조심스럽지만 환자가 의사를 믿지 못해 병을 키우는 것처럼 독자가 작가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병을 키우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요즘 유명 인기 작가의 표절시비가 안타깝습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면서 자신의 저서를 남김없이 모두 없애버리라고 유언한 것이 자신의 글에 흠취했던 독자에 대한 우롱이나 배신이겠습니까? 무소유를 설파하는 가장 강한 메시지가 아닐까요? 요즘 먼저 작가 쪽에서 치열한 작가 정신의 구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교직생활이 선생님의 사물에 대한 분석력과 표현력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까?

교직이 다른 직종에 비해 퍽 단순해서 오늘이 어제같이 그저 그렇게 지나치기 쉽지만 학생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 나날이 새롭게 됩니다. 나의 고등학교 담임 초창기에는 성적통지표를 두 달에 한 번씩 자주 발송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과목 성적과 학급과 학년 석차만을 기록하는데 급급했지요. 이때 나는 덧 부쳐 성적통지표의 가정통신란에 학생 개개인에 대한 관찰사항을 세밀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부모에게 전달되는 글이라 학생에 대한 관찰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겠고, 또 표현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작은 노력이 학부모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 성취경험이 교감을 하면서 전교 학생들의 통지표를 일 년에 네 차례씩 꼭꼭 챙기게 했습니다. 간단하게 격려의 말을 적거나 하다못해 ‘아무개 화이팅! 교감’이라고 적고 날인을 했지요. 이 일로 담임들의 불평도 많이 들었으나 그건 내가 사전에 감당할 각오를 한 것이었습니다. 교감이 직접 챙기는데 담임이 자기 학생들에게 어떻게 소홀할 수가 있겠습니까?

짧은 2,3일 동안에 전교생 1200명의 통지표를 보고 몇 마디라도 적자면, 나중에는 팔에 쥐가 내리고, 눈알까지 아파 와서 내가 자초해서 무슨 짓인가? 솔직히 후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의 있는 통지표에 학부모들은 감사하고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교감평가에 좋은 등급을 받게 했고, 사물에 대한 빠른 분석력과 표현력을 배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글쓰기가 본인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퇴직을 하면 퇴물이 된다더니 정말 마땅히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미 수술을 여러 차례 받은 몸이라 건강을 챙기는 일이 할 일의 전부였습니다. 친구들과 산행을 가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무료하기만 할 뿐, 스스로 폐기물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추락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동기회 카페에 엉거주춤 글을 올리게 되었지요. 시답잖은 글로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나의 자질구레한 일상사가 남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괜히 자기 자랑같이 비쳐져 비난이나 받으면 어쩌나 하고 많이 망설여졌지만 친구들의 격려 답글이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로 또 외국으로 흩어져 소원했던 친구들을 온라인상으로 수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이제 글쓰기는 서툰 대로 남은 시간을 엮어가는 무명실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가늘어 끊어질까 마음 조리고 종종 보기 흉한 보푸라기 때문에 속상하지만 그래도 한 타래 무명실을 뽑고 나면 뿌듯한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언감생심 이 무명실로 그럴듯한 옷감 하나 지으리라는 기대야 애당초 분수를 넘어서는 무명인의 무명실이지만 이제 나에게 할 일이 생겼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평소에 계획 없이 대충 살아온지라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시니 말문이 탁 막힙니다. 계획 없이 살아도 살아지더냐고 그래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더냐고 질문해주시면 훨씬 수월하겠는데….

이제 내일 모래면 내 나이가 칠순입니다. 아직도 등산로의 급경사 오르막만 고집한다면 그건 지나친 노욕입니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주위 경치도 살피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서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최종 목표는‘잘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 죽기 위한 음모를 계획이라고 들이 내밀 수밖에는 없네요. 먼저 냄새 나는 내 모습을 잘 감추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일에 바쁘겠네요. 그렇다고 너무 완벽하게 분칠하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다보면 오히려 들켜버릴 위험성이 더 큰 법이니까요.

명색이 모태 신앙인으로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계산하자고 다가오시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초조합니다. 개학을 앞두고 잔뜩 쌓인 방학과제물 앞에서 허둥대는 아이처럼 이것저것 책망 받을 일만 눈에 뜨이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내 딴에는 볼품없는 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계속 투고하는 것도 그런 고민의 산물임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라도 작은 책 한권 지니고 갈 수 있다면 내게는 호강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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