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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스스로의 힘으로 문화 보존을 위한 노력해야"[사람, 사람을 만나다] - (67) 공기화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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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31  13: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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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화(68·부산광역시 남구 용소로)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가 그의 두 번째 수필집 ‘뒷모습을 그리다’를 출판했다. 그는 부산교육대학교에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쳐 왔다. 교육자로서 수필가로서 향토사학자로서 나이를 잊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공기화 교수를 만나 그의 수필집에 못다한 뒷이야기와 최근 들어 그의 관심을 끌고 있는 향토사에 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 교수님께서는 최근에 수필집을 발간하였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8월 초에 저가 쓴 『뒷모습을 그리다』이라는 수필집이 출간되었답니다. 첫 수필집인 『푸른 언덕이 있는 남촌』이 나온 지 만 12년 만에 출간하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저가 박사학위를 받은 날에 뒷모습을 사진을 찍었는데, 자만하지 말고 더 학문에 정진하고자 뒤통수 사진을 찍은 것이 책의 제목이 되었네요. 1장은 저의 유년기부터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나를 형성케 해준 과정, 생애의 편린들을 적었고, 2장은 인생을 방랑자로 비유하며 국내외 여행 수필이며, 3장과 4장은 저의 대표적인 수필을 모은 순수수필입니다. 5장은 부산의 향토사를 수필로 쓴 것입니다. 사실 제목은 ‘엑스트라 인생’을 정하려 했으나, 이러한 고민에 대해 상담을 해주던 시인인 친구가 자칫 저의 이미지를 해칠 수가 있다며 만류하였습니다.

책에 대한 서평을 해주신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인 양왕용 교수님께서는 제 책의 내용에서 ‘진지한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 수필은 50 ~ 60년대의 부산과 남구의 풍경과 풍물을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대리 체험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산과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쓴 글이지요.


- 수필집의 5장에 부산의 향토사가 나옵니다. 교수님께서 향토사에 관심을 둔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가 대학 졸업반 때에 교육대학원 시험공부를 할 때에 그해에 국어가 출제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당시에 서울사대의 국어과에 원로 교수는 두 분의 교수님께서 계셨는데, 한글학자인 이응백 교수와 전래 소리 등 민속을 수집하며 연구를 한 이두현 교수였습니다. 대학원을 마친 선배가 이두현 교수의 책을 구해주기에 정독을 했지요. 그리고 딸이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통에 우리의 옛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 교수님께서는 향토사 자료를 어떻게 수집하십니까?
우선 역사, 문화와 민속에 관련된 책과 신문 등을 많이 읽습니다. 각 지역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다를 바가 없지요. 경로당을 찾아가서 주위에 사라진 것이나 지역의 옛 이야기들을 듣을 때도 있습니다. 정년퇴임 후부터 부산민학회의 답사와 강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주경업 회장님은 수 십 년 전부터 전국을 누비며 자료를 정리를 하신 분이지요. 그분의 책이나 자료는 길을 찾는 나침판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부산과 민속에 관련된 책을 서점에서 구입하기도 하고 보수동 헌책방을 뒤지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니 대학 도서관에 가서 신문더미를 찾을 때가 많답니다.


- 교수님께서는 사실(facts)를 어떻게 검증하십니까?
하나의 일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을 때입니다. 이럴 경우에 발품을 파는 것이 최상이지요. 의문이 생기면 전문가나 관련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들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공통점을 찾게 됩니다. 이럴 때는 어떤 희열이 느껴지지요. 관련된 문헌이 있는가를 구청, 대학도서관, 박물관, 신문사 등에 찾아가서 향토사 관련 서적이나 신문 등 자료를 찾아 사실을 검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향토사나 역사의 전문가와 연구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견해를 물으며 사실을 검증하지요. 저의 경우에 향토사를 연구하려면 의식주, 건축, 의복, 무속, 노래, 춤과 그림 등을 망라한 우리의 문화 전반에 대한 기초(basic)이 많이 부족하답니다.


- 어떠한 점이 부산만의 독특한 향토사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산을 삼포지향(三浦之鄕)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바다, 강과 산이 있는 삼포지향의 도시이지요. 우리나라의 동남의 끝자락으로 바다와 길게 접하는 지리적, 역사적 특성 등으로 부산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강과 바다와 접한 곳이지요. 일본과도 가까워 무시하는 이도 있지만 개방적인 도시로 어마어마하게 발달되었지요. 오거돈 전 해양대학교 총장은 부산의 미래를 해양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부산과 동래는 신라시대 이후에 사실 변방이 되어 버려진 땅과 비슷했지요. 특히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땅이 되어 고려가 통일을 한 후에 부산을 포함한 동래는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고, 선비의 교육기관인 향교조차 늦게 개설되었을 정도입니다. 부산은 근대사에서 가장 먼저 개항 이후에 우리나라의 관문이 되어 일본을 비롯하여 근대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이후에 문화를 꽃피웠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해방, 6.25전쟁과 공업화로 말미암아 인구가 급증하고 급속도로 발전된 도시이지요. 그러다 보니 주택지가 부족하여 산동네가 발달되어 기형적이고 복잡한 도시형태와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시민들은 성급하고 도전적이어서 새로운 문화를 창작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부산의 역사나 문화의 보존과 발전 방향에서는 항상 변방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부산의 힘으로 일어서지 않으면 더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향토사 어떠한 영향을 미쳤습니까?
저가 중학교 12학년 때에 5,16군사변혁이 일어났지요. 저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발전과정을 보아왔지요. 새마을 노래가 골목마다 울리면 날마다 새롭게 변혁되기도 했지요. 큰 신작로가 닦이고 초가나 함석지붕은 기와나 석면으로 된 지붕으로, 흙이나 돌로 된 담장은 블록담장으로 바꿨지요. 벌목으로 인하여 벌거숭이인 산에 산림녹화로 푸른 산이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연료는 집집마다 장작에서 연탄으로 바뀌어져 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은 덜었으나 겨울이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생했던 시기도 있었지요. 가구도 반다지나 자개농 대신에 호마이카 장롱이 유행되기도 했답니다. 녹을 닦아야 했던 놋그릇과 잘 깨어지는 자기나 사기그릇 대신에 소위 스덴그릇이라 불렸던 스테인리스 그릇이 시중에 나오자 너도 나도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누대에 전해졌던 집안의 기물들도 버리거나 엿장수에게 팔거나 엿을 바꿨답니다. 옛 것이 낡은 것이나 고물로 치부되어 많은 것이 사라졌지요. 이것들이 우리의 문화였던 것을 귀하게 되었을 때부터 알게 되었지요. 부산의 고무신 및 신발공장, 조선, 부두, 신진자동차, 합판, 주물 공업의 발달로 남부여대하여 농어촌에서 부산으로 인구가 유입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대화로 잘살게 되었으나, 인구가 도시에 집중하다보니 일가친족이나 마을 중심의 공동체가 점차 퇴색되어 버렸고, 공동체 중심으로 행해졌던 미풍양속이나 우리의 민속을 잃게 되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재나 전설 등이 사라졌지요. 사실 우리의 근대화는 우리를 잘 살게 되었습니다만 우리의 문화를 사라지게 한 주범이기도 하지요. 늦게나마 문화재청은 우리의 무형문화를 존속하기 위한 장인들을 정하여 인간문화재로 선정하기도 하고, 무형문화원나 대학의 민속학과 등에서 부단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옛 것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 교수님께서는 남구의 향토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그곳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대연동에서 태어나 서울생활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2013년도에 발간했던 남구의 향토사인 ‘내 고향 부산남구 그 시간의 숨과 결을 느끼다’의 집필위원에 참여하다가 남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것을 집필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책도 많이 읽었지요. 그것은 남구의 향토사를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지난 5월에 ‘자랑스러운 남구 구민상’을 받기도 하였지요. 남구는 1970년대 이전에는 전형적인 농어촌이었습니다. 바다가 넓게 있어 해산물이 풍부했지요. 일제강점기에는 부산의 관문과 내항인 용호동, 용당동, 감만동, 우암동은 군사요충지로 많은 산에 고사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비밀히 잠수함기지 등이 건설되다가 해방을 맞았지요. 산업의 발달로 남구의 바다는 용호동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는 부두와 공장에서 바다를 매립하는 통에 주민들이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바다를 잃게 되었지요. 사실 절경인 광선대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지금은 아파트가 세워져 있고, 부두와 해군작전기지로 신선대와 백운포는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남구에는 대연동과 용호동은 주택가가 되었지요. 그리고 부경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 동명대학교, 부산예술대학 등이 있어 교육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경성대·부경대역 중심으로 젊은이의 거리로 교육, 연극, 극장, 패션, 쇼핑 등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요. 또한 이곳은 UN기념특구로 지정된 곳인지라 음식점, 까페, 극장 등이 있어 인종을 초월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으며, 젊은이들의 소통의 거리로 유명합니다. 호텔 등 유흥문화가 없다는 것이 다른 지역과 차별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소비문화가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극이나 음악 등 공연 등 문화의 수준은 이곳이 아직까지 서울의 대학로처럼 발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 교수님께서는 찾은 이기대 기생의 묘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연히 초등학교 1년 선배인 왕정문 씨와 함께 이기대의 두 기생의 묘를 찾게 되었습니다. 경상좌수사였던 이형하가 편찬했던 내영지(萊營誌, 東萊營誌)의 산천조(山川條)에 이기대의 유래를 찾아보면, 좌영남십오리, 상유이기총운(左營南十五里, 上有二妓塚云) 즉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십 오리 되는 곳에 위에 두 기생의 큰 무덤이 있어 그리 말한다.”가 있다. 이것을 토대로 이기대 장바위 위에 있는 2기의 큰 무덤을 찾아 구청과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알렸습니다.

용호동에 전해진 각시당의 전설이나 수영의 향토사학자인 최한복 씨가 전했던 ‘임진왜란의 승전을 위한 이기대에서 열은 잔치에서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바다에 빠져 죽은 남이와 경아라는 두 기생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인들은 두 기생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물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이곳의 전설이 논개의 이야기와 너무 닮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랍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사실 유사한 죽음이지만, 먼저 사료가 정리되었다고 하여 다른 전설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내영지의 기록과 무덤도 있는데 세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아직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근처의 각시당의 전설이 이기대의 전설과 유사하고, 이 무덤 근처에 있는 인근 지역인 대연동 용소마을의 경주 이 씨 이양섭(李良燮)의 무덤에 대한 위치가 족보에서의 산소의 위치가 의부지(義婦地)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두 기생은 의로운 일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문현동 출신의 곽태욱 작가가 쓴 ·『소설 이기대』는 전설과 역사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 이기대의 전설을 바르게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 교수님께서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대학에서 명예교수에게 주어진 3년간의 강의가 지난 학기에 마쳤습니다. 참으로 시원섭섭한 것도 있지만, 정말 그만 두고 싶었습니다. 정년퇴임 후 줄곧 생활해왔던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에 가고, 아침운동을 한 후에 글을 쓰거나 성경을 읽은 후에 외출하는 생활패턴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주 1회 꿈틀씨앗학교란 대안학교의 한문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계속 할 것입니다. 능력이 뒤따르면, 향토사 연구에 노력할 것이며, 3번째의 수필집을 준비하고 싶군요. 욕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학기까지 초등학생들에게 지도했던 남구지역의 향토역사와 문화에 대한 수업도 지속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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