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 UPDATE : 2019.11.14 목 07:43
> 기획/연재 > 사람을 만나다
기업가에서 신앙인으로... "상조 통해 사랑 베풀 것"[사람, 사람을 만나다] - (63) 보람상조 최철홍 회장
김신은 기자  |  kse@leaders.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신고하기
승인 2015.08.04  10:05:12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미투데이 트위터
   
 보람상조 최철홍 회장

대한민국 상조업계를 이끌어 가는 대표 상조인 보람상조 최철홍(59·사진) 회장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냈다.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가장의 역할, 경영악화로 인한 부도위기, 건강악화 등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그는 깊은 신앙심 하나로 굳게 버텨왔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목사 그리고 한 기업의 회장으로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아끼지 않으며 국내·외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철홍 회장. 그를 만나 잘나가는 기업의 회장에서 목사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과거에 대해 들어보았다.

◇ 가난했던 어린 시절
 1981년 현역사병이었던 최철홍 회장은 군 생활 마지막 휴가를 막노동으로 보내야만 했다.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당시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이 모두 금정구 금사동에 위치한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수소문 끝에 이사한 집을 찾아가던 중 먼발치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이 촌스러운 왜바지를 입고 낑낑대며 손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순간 후회와 미안함,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죠.” 군 제대 후 그는 막노동부터 보험영업사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젊은 나이에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흥국생명의 보험영업사원으로 2년 동안 근무하며 사업가로서의 성장에 있어서 밑거름이 될 일생일대의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능력과 재능을 깨닫고 그 동안 모아둔 목돈으로 건강, 위생용품을 판매하는 ‘현대실업’을 설립, 사업가로서의 변신을 하게 된다.
 
◇ 1986년 주님의 영접, 상조사업에 눈 뜨다
 현대실업을 운영할 당시 그는 자신의 뛰어난 아이디어와 마케팅 능력을 발휘하며 한때 사원이 1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한 사업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첫 사업으로 부족했던 경영상의 어려움은 곧 부도의 위기를 몰고 왔고, 29세 젊은 나이에 힘들게 이룩한 사업이 무너지며 이에 대한 자책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극심한 우울증을 겪게 된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며 시련을 외면하고 싶었던 그는 사업실패와 자살시도가 지금의 보람상조를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죽음의 목전에서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 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자고 생각하면서 구상한 사업이 상조사업이었죠.” 그리고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느끼게 된다.
 
◇ 대표 상조기업으로 자리매김 위한 ‘발돋움’

 1987년, 그는 상가집 현장을 돌며 개인장의업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은 ‘상조업’이라 부르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상조업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소한 직종이었다. 그는 고향인 부산에서 장의사업을 시작으로 ‘세종병원 장례식장’, ‘동아대학병원 영안실’, ‘성분도병원 장례식장’ 등 병원과 연계된 장례식장 사업을 시작했다. 기존의 연세든 장의사들이 단순히 염습 과정만을 거치는 수준에서 벗어나 ‘꽃 제단’, ‘출동 서비스’ 등 새로운 서비스 아이템을 도입했다. 최 회장의 이러한 서비스 정신은 입소문을 통해 상가집 조문객에서 고객이 되는 등 사업적으로 큰 성공과 더불어 부산 여러 지역에 분점을 낸 발판이 됐다. 뿐만 아니라 업체가 있던 인근 동래구와 금정구 일대의 불우이웃, 독거노인들을 위해 무료 장례행사를 봉사하며 처음 장의업에 뛰어들게 된 신앙 정신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성공과 영달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장례업계에 만연하던 관례, 폐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서비스 정신의 결여, 상품 가격의 지나친 폭리, 서비스 품질 개선 노력의 부재 등 장의업계의 문제의식을 통해 장례용품 품질 개선과 용품가격의 거품 제거, 투명한 용품 거래, 정찰제 등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견식을 넓히기 위해 일본의 상조회사에 직접 방문해 체계적인 연구를 함으로써 상조업에 대한 비전과 확신을 갖게 된다. “부산지역 장의협회를 통해 기존의 잘못된 관행의 문제점과 미래 장의산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상조시스템 도입과 합리적인 장례문화를 역설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잘못된 관행과 폭리에 익숙해져 있던 일부 사람들의 반대와 알력, 시기로 인해 장례문화 전체를 개혁하고자 한 저의 결실은 안타까움을 남길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현재 그의 노력은 장례업계를 상조시스템 중심으로 선진화, 합리화 하려는 업계 최초의 자발적 시도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1991년 노력의 결실 맺어지다…‘보람상조’ 탄생
 기존 장의업의 한계와 악습에 대한 문제의식, 새로운 장례서비스로서의 ‘상조’를 주목한 최철홍 회장. 그는 선도적 상조기업을 설립해 업계의 개혁을 결심하고 1991년 ‘보람상조개발’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전국을 기반으로 한 문화기업을 목표로 진정한 상조 시스템을 갖추고 장례서비스와 관련된 업계의 표준을 제시하는가 하면, 장의서비스에 국한되지 않는 웨딩 서비스, 이벤트 사업까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상조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에 주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국내 최초 ‘사이버추모관’ 서비스를 시작으로 공중파 TV광고, 홈쇼핑 판매, 온라인 및 모바일을 통한 차별화된 고객 소통으로 산업 전체 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사랑, 봉사, 정성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일하되 변해가는 시대상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상조는 무엇보다 서비스를 받기 위해 선택하는 상품이고, 무엇보다 서비스 제공자의 경험이 가장 중요시 여겨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조산업의 획기적인 문화 선도를 이끌어낸 보람상조는 전문 장례 서비스 교육시스템을 구축, 전국 80여개의 직영지점망 및 전문 장례지도사, 복지사, 도우미 등을 확보해 연간 1만2000여건 이상의 장례서비스를 수행하면서도 변함없는 고품질 상조서비스를 제공하며 신뢰를 쌓아갔다. 최 회장은 “보람그룹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상조업계 최고의 관혼상제 전문기업에서 더 나아가 세계 만국의 공통된 서비스 이념인 ‘내 부모 내 형제처럼 정성을 다하는’ 봉사정신과 사랑을 토대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져나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 큰 풍랑을 만나다…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
 1995년 그는 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부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2006년, 부산 남구 용호동에 위치한 작은 건물 2, 3층에 임대를 받아 가족 7명과 함께 첫 교회를 개척했다. 그 후 부산 남구 대연동에 ‘주찬양교회’를 설립, 2010년도에 장로로 입당하게 된다. 기업을 운영하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기쁨이 있었지만 목사가 되기 싫었던 그는 회사 핑계를 대고 잠시 미국으로 떠나 목사 안수를 거부했다. 2010년 3월 8일, 안수식은 그렇게 지나가고 며칠 후 그는 미국 방송을 통해 황당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 뉴스의 내용은 그가 회사 공금 300억 원을 횡령해 미국으로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법 노조와의 대립관계가 형성되고 고소·고발 상황이 잇따르며 그는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하지만 2년 동안의 옥살이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가치를 안겨준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강도사로 판명된 그는 매일 저녁 성경 공부를 하고, 초범으로 수감된 정치인, 경영인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11~12번의 각종 설교와 성경공부 인도 등을 하며 약 1년 5개월 동안 신실한 목회활동을 이끌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것, 외면하려 했던 것을 후회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적적인 ‘삶’을 되찾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번째 풍랑이 몰아쳤다. 옥살이를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심한 허리 통증을 느낀 그는 곧바로 근처 병원 응급실로 이송된다. 그리고 ‘허리디스크’ 판명을 받는다. 수술을 위해 피검사를 하던 중 ‘전립선암’ 3기 말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수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상태는 심각했고, 1년 반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때 그는 생각을 가다듬고 2013년 5월 8일이 되던 날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남은 시간이라도 열심히 목사생활을 하다 가겠다”며 “대신 고통만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는 힘든 투병생활을 하며 간절한 기도와 함께 긴 봄을 보냈다. 얼마 후 그는 방사능 치료를 받게 됐고, 최대 24회까지 가능한 방사능 치료를 아무 문제없이 48회까지 늘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암수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며 정상인의 암 수치인 ‘3’도 안 되는 ‘0.01’로 완치돼 시한부 인생에서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방사선 치료 과정에서 다른 환자와는 달리 구토, 설사 등의 증상이 전혀 없었고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치료를 받으며 기도를 할 때 제 몸 안에 큰 얼음(암)덩어리가 급격히 녹는 것이 느껴졌어요. 치료로 완치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는 살아계십니다.”

◇ 주찬양교회 설립목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다
 “저는 요즘 회사에 갈 때와는 다르게 교회에 올 때 가장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항상 ‘일 좀 안하게 해 주세요 주님의 일만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최철홍 회장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작년 8월 말 ‘보람장의개발’이라는 개인 업체를 완전히 법인회사로 내보내는 사업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100개의 교회를 설립하라’는 사명을 받아 첫 번째 교회인 ‘주찬양교회’ 설립을 시작으로 두 번째 교회인 ‘엘림교회’의 담임으로 목회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100개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목회자를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열심히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새기고, 선도들을 이끄는 목사와 한 기업의 회장을 아우르며 사적·공적으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아끼지 않고 있다. 회장으로서 그는 국내외 봉사활동, 이라크 한방의료봉사, 독거노인봉사, 길거리 청소 등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봉사활동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지난 2012년 ‘보람상조 사회봉사단’을 출범시켰다. 지역사회를 위한 의료 활동, 복지시설 임직원 봉사활동 및 취약계층을 위한 치료비 지원사업을 꾸준히 전개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상조기업의 롤 모델을 제시하는 한편, 목사로서 그는 교회를 찾는 노인들을 위해 차비와 식사를 대접하고, 무료 장례식과 결혼식을 치러드리며 그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베풀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 회장은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없는 돈과 시간을 쪼개서 빠짐없이 참석해 하나 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프다”며 “이분들을 내 부모(내 아버지, 내 어머니) 그리고 형제, 자매처럼 섬기면서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이들과 소통하며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이라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김신은 기자 kse@leaders.kr

김신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신고하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미투데이 트위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중앙대로 594 |  대표전화 : 051-996-2400  |  팩스 : 051-996-2408  |  등록번호 : 부산 가 00020  |  발행·편집인 : 백재현
등록번호 : 아00219 |  등록일자 : 2015년 2월 06일 |  청소년 보호책임자 : 백재현
Copyright © 2014 일간리더스경제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