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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미래, 사부대중이 함께 생각해야 할 일[사람, 사람을 만나다] - (54) 한보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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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26  13: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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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를 기준으로 하는 불기(佛紀)로써 연대를 표기한다. 불가에서 불기(佛紀)를 사용하는 것은 육신의 부처님보다 영원한 진리로 돌아가신 부처님에 더 깊은 의미를 두기 때문이라 한다. 불기 2559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불교적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의 시세계를 표현해온 한보경 시인(55, 여, 해운대구 우동)을 만나 보았다. 시를 쓰는 시인이기에 앞서 재가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마음가짐과 문학과 불교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느낌을 편안하게 나누며 부처님 오신 날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 불기 2559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특별한 감회가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 무렵이 되면 지친 몸과 마음에도 촉촉한 생기가 도는 걸 느낍니다. 올해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겨울 내내 호되게 감기를 앓고 지냈습니다. 보왕삼매염불직지 총 22편은 우리가 어려운 장애를 만났을 때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병을 고통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수행의 기회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지난 겨우내 움츠린 몸과 마음의 묵은 껍질을 벗고 좀 더 건강해진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오신 뜻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 한 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종교와 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교와 문학은 등을 기대고 눈빛을 교환하는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가까운 관계는 어느 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가까운 만큼 보이지 않는 은근한 견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와 문학의 관계에 분명히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의 무게를 가늠하거나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종교와 문학은 모두 우리의 삶에 출발점을 두고 있고 우리는 문학과 종교 활동을 통해 삶의 용기와 행복을 얻으니까요. 시를 쓰는 저에게는 저자거리의 삶보다 시를 통해서 상처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시는 늘 저를 다시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생활 속의 짧은 기도 역시 제게 크고 무한한 치유와 위로가 되어줍니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기도는 가장 강력한 진통의 힘을 발휘하는 시이고, 시와 더불어 사는 일상은 평온함을 주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몇 해 전 제대로 의례를 갖추어 한 것은 아니었지만 49번의 금강경 사경 후에 금강경을 독송하는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의 이유를 조근조근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를 읽을 때와 흡사했습니다. 성경이나 부처님의 원음 속에는 무한한 메타포가 숨어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었을 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지었다는, 그 이심전심의 함축적인 미소 속에 이미 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문학을 통해 끝없는 물음표를 던지고 기도와 수행을 통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결국 문학과 종교가 어떤 경계로 구분할 수 없는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 등단을 불교문예로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불가에서 말하듯 오래 전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읽으시던 천수경을 들으며 아침잠에서 깨어나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불교적 메시지가 제 삶의 일부가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를 쓰면서 저는 등단이라는 어렵고 번거로운 절차를 굳이 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를 쓰는 것도 기도처럼 제 삶을 일부를 바꾸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한편으로는 각질처럼 떨어져 나온 또 다른 나의 분신인 시라는 친구를 마냥 외면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도반 같은 시를 위해 자연스럽게 앉을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이 불교문예와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시를 쓰게 된 후, 시를 쓰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전공이 국어교육이기 때문에 시를 늘 텍스트로서 분석과 이해의 대상으로 공부를 했었고 또 교육현장에서는 교과과정에 맞는 방식으로 시를 분석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자주 읽고 느끼고 분석하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늘 시를 곁에 두고 있었던 셈이었지요.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은 제게는 하나의 객관적 상관물로 존재했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시를 쓰게 된 일은 우연처럼 찾아온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시를 쓰면서부터 시를 좋아하고, 읽고, 느끼고, 분석할 때는 결코 보지 못했던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텍스트에 가려졌던 세상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었던 세상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풀과 꽃과 나무들의 미세한 떨림, 시들어가는 잎사귀들이 건네는 인사들, 길고양이들의 쓸쓸한 허기, 버려진 가구들의 지난한 이야기들, 심지어 진개장에 쌓인 먼지와 악취에도 그들만이 지닌 눈빛이 있고 남루하게 빛나는 이야기들이 보입니다. 여전히 캄캄하지만 가끔 안경을 벗어도 괜찮을 만큼 사물들의 숨은 모습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아마도 시를 쓰면서 자꾸 높아지는 안경도수와 상관없이 시력은 점점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몰랐을 세상을 슬며시 엿볼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해주기 바랍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선뜻 이것이라고 선을 보이기는 부끄럽습니다. 언젠가 멀리 여행을 하던 중 문득 ‘거기였던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였던 여기에 어느새 내가 와 있구나. 지금의 여기는 또 어딘가의 거기로 흘러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생겼었지요. 그 짧은 순간의 먹먹한 인식이 시가 되었습니다. 저의 첫시집이기도 한 <여기가 거기였을 때>입니다.
여기를 몰랐고/거기도, 나는 몰랐다// 여기에서 나는 비로소/두고 온/거기를 기억했다// 거기가/다시 여기가 될 때// 거기에서 나는 또/여기를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 내리고 있는 비와/거기에 쏟아지던 햇살// 여기로 불어오던 바람과/거기로 흘러가는 해거름의 구름들// 한때는/모두 거기였던// 여기는/지금, 한때의 거기로 가고 있다
 - <여기가 거기였을 때> 전문 -
 
- 최근 부산 근교에 작은 문화공간을 마련하느라 바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공간인지 소개를 부탁합니다.
 부산에서 울산 쪽으로 해안을 따라가는 길은 참 아름답습니다. 서생을 막 지나 간절곶 근처에 솔개마을이라는 작고 예쁜 해변에 집이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방치해 두다가 올 봄에 엉뚱한 용기를 한번 내보기로 한 것이지요. 버려둔 집에 대한 반성과 고해성사의 마음도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새로 이름표도 달아주었습니다. <공간 도도>입니다. 기운이나 힘을 돋우다는 ‘도도다’의 어간 ‘도도’이기도 하고 길과 길이 만나 또 다른 길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도서수집가가 된다는 것은 마약중독자와 구두쇠의 가장 나쁜 특징을 결합한 것이다”라는 로버트슨 데이비스의 말처럼 우리는 책을 지닌 것과 읽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공간 도도>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먼지 묻은 책장의 책 뿐 아니라 각자에게 이미 있었지만 꺼내 읽지 못하던 마음의 책까지 다 꺼내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뽀얗게 앉은 책먼지를 털어내고 책이 주는 달콤한 평온을 느낄 수 있는 호젓한 공간을 꿈꿉니다.
 
- 불자로서 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다면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감히 그런 큰 부분을 이야기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는 불교 뿐 아니라 종교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불법은 이어질 것이라 낙관하고 싶습니다. “불교는 과학이다. 미신이 아니다. 우리가 불교에서 과학성을 잃을 때 늘 문제가 생긴다. 기복적인 믿음만 남게 된다”라는 현각 스님의 말씀을 읽은 적이 잇습니다. 정확하게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젊은 세대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는 미래의 불교를 위한 대안이 들어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내일의 젊은 세대들이 거부감 없이 불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앞으로 좀 더 현실에 맞는 대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느 한 편에게만 책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이 함께 나누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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